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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5

조선시대 박포의 난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에 일어났던 박포의 난에 대한 것인데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배경이 어떻게 되는지


박포의 난의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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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400년(정종 2)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을 말합니다.

    일명 방간의 난 또는 박포(朴包)의 난이라고도 한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세력구조는 이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바뀌어 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아직 사병을 거느린 동모 형제(同母兄弟)들이 여럿 있고, 그들의 세력도 적지 않았다. 이방원으로서도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어 항상 그들을 견제하였다.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 역시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과 호기(豪氣)가 있었으나, 인격·공훈(功勳)·위세가 이방원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항상 시기심과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형세 속에서 마침 지중추부사 박포의 밀고가 있었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 등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난의 성공에 공이 많았다. 그러나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해 불평하다가 죽주(竹州: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로 귀양갔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이방간이 이방원에 대해 불평하자 이방간의 거병을 선동했다. 박포는 이방원이 장차 이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했다. 이방간은 이 말을 믿고 사병을 동원하였다. 이방원도 곧 사병을 동원해 개성 시내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결국 이방원이 승리하고, 두 사람은 체포되었다. 이방간은 유배되었고, 박포는 사형당했다.

    이로써 이방원을 반대하는 세력은 거의 소멸되었고, 그의 정치적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따라서 이방원의 왕세제 책립은 결정된 셈이었다. 난이 평정된 뒤 이방원의 심복 신하인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륜(河崙)의 주청을 받아들인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 이방원을 왕세제로 책봉했다. 이어 11월 왕위를 이방원에게 물려주니, 그가 제3대 태종이다.

    이와 같이 제2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들 간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세력관계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고, 사회적인 영향력도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추진하던 병권 집중과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한 제도 개혁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제도 개혁의 결과 사병이 혁파되고,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폐지되고 의정부가 설립되었다. 또한 승정원을 따로 두어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다. 결국 제2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하고, 태종 때의 왕권 강화 기반을 조성한 일련의 제도개혁을 가능하게 한 촉진제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2차 왕자의 난 [第二次王子─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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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15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방간은 조선 태조의 제4남으로 왕위계승에 대한 야심을 가지고있었으나 인격, 공훈, 위세가 아우인 방원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왕위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않고 있어 방원에 대한 시의심을 품고있었는데 그러던 중 제1차 왕자의 난에 큰 공을 세운 박포가 그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있었으므로 자연 방간과 박포는 서로 뜻이 맞아 둘이 공모해 방원의 세력을 꺾기 위해 반란을 일으킵니다.

    방간과 방원의 군사는 개경에서 접접하는데 결국 방간의 군대는 패하여 방간이 유배가 되었고 박포는 처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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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400년 (정종 2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인데 일명 방간의 난 또는 박포 (朴包)의 난이라고도 합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세력구조는 이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바뀌어 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는데요. 이방간은 이성계의 4째 아들인데 왕에 대한 야심이 있었습니다. 박포는 이반간에게 이방원이 방간을 죽일거라고 거짓 밀고를 했고 이에 이방간은 난을 일으켜 먼저 이방원을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 하고 맙니다. 이렇게 박포는 죽고 이반간은 유배를 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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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2차 왕자의 난은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1400년(정종 2)에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입니다. 회안대군 방간이 주도하여 일으켰다고 하여 방간의 난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박포가 중간에서 형제를 이간질하여 일으켰다고 하여 박포의 난이라고도 합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쳐 정종이 즉위하면서 방원 일파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병을 왕자들과 종친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정종에게는 정비 소생의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후사는 동생들 중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되었으며, 가장 유력한 이는 역시 이방원이었습니다. 익안대군 이방의는 왕위에 뜻이 없었던 반면, 태조의 넷째 아들인 방간 역시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형세 속에서 마침 지중추부사 박포가 방간에게 방원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를 하였습니다. 박포는 원래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난의 성공에 공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해 불평하다가 죽주로 귀양간 바가 있었습니다.


    방간은 박포의 밀고를 믿고 사병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건의 진행 과정을 보면, 박포는 거병 당시 중립을 지키며 관망하였고, 방간의 거병 계획을 직접적으로 태종에게 고한 것은 방간의 처조카 이래였습니다. 그는 좌주였던 우현보에게 알리고 우현보가 그의 아들 우흥부를 통해 방원에게 알림으로써, 이방원 역시 거병을 대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양측은 둑제를 위한 사냥을 핑계로 사병들을 모아 거병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개성 시내의 남산(자남산이라고도 함)에서 선죽교에 이르는 일대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으나 결국 방원이 승리하였습니다. 방간은 예전 고려 공양왕이 건설한 적경원 터에 도착하여 투항하였고, 그의 희망에 따라 토산 촌장으로 추방하였습니다. 방원 측의 추궁에 따라 방간은 박포가 중간에서 거병하라고 유인하였다고 자백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박포는 함주에 귀양을 갔다가 나중에 그곳에서 사형 당하였습니다.

    이로써 방원을 반대하는 세력은 거의 소멸되었고, 그의 정치적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따라서 방원의 세자 책립은 결정된 셈이었습니다. 난이 평정된 뒤 3일 후인 2월 1일에 방원의 심복 신하인 하륜의 주청을 받아들인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방원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이어 11월 왕위를 방원에게 물려주니, 그가 제3대 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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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차 왕자의 난이 이복형제 간의 싸움인데 반해 2차 왕자의 난은 동복형제 간의 싸움이었으며..

    방원에 대한 방간의 시기심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일로 방원은 세제(왕위계승자로 결정된 왕의 동생)의 자리를 확보하게 된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조선의 세력 구조는 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변하여..

    이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원의 동복형제들은 여전히 사병을 거느리고 있어..

    이들은 방원에게 만만치 않은 위협 요소가 되고 있었다.

    특히 태조의 넷째 아들인 방간은 노골적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과 호기를 드러내곤 하였으나..

    인격·공훈·위세가 방원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이에 방원은 정도전이 추진했던 병권집중운동을..

    이어받아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다.


    방원이 정략적으로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조짐을 보이고 또한 왕위 계승에 대한 조정의 중론이..

    방원쪽으로 흐르자방간은 점차 시기심과 불만이 쌓여 갔다. 그런 와중에 박포가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밀고하자, 방간은 그 진위를 가려보지 않은 채 사병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지중추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방원을 도와 난을 성공적으로 수습한 공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죽주(지금의 영동)에 귀양보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중 방간이 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음을 알고, 방간에게 방원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하였다. 방간이 이를 믿고 군대를 동원하자 방원도 군대를 동원하여 개경에서 싸움이..

    붙었는데, 형세가 불리하였던 방간은 방원에게 패배하여 유배되고 박포는 사형에 처해졌다.


    방간의 난이 수습된 후 조정의 대신들은 수차례에 걸쳐 방간을 죽여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끝까지 그를 죽이지 않고 유배시키는 데 그쳤다.방원은 오히려 방간이..

    병이 나면 의원을 보내 그를 치료하게끔 도와주기도 하였다. 또한 방원이 상왕으로 있던 세종의 치세..

    때에도 방간에 대한 치죄가 논의되었지만 방원과 세종은 이를 거부하였다. 방간은 방원의 배려에 따라..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홍주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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