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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팬더곰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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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불교는 언제부터 전파되었던 것인가요?

우리나라에 보면 조계종이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소승불교 대승불교라고 했는데 왜 지금은 조계종이라는 종파나 원불교처럼 나누어져있나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파된 불교는 무엇이고 언제 전파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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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에 들어온 공식 연대는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이다. 백제는 그후 384년에 불교를 받아들였고, 신라는 527년(법흥왕 14)에 국가의 공인을 받았다. 삼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왕실이었다. 고구려나 백제 왕실에서의 불교 수용태도는 사찰을 지어 불상(佛像)을 모시고 불공을 드리면 곧 현실적인 이익이 있다는 기복적(祈福的)인 관점에서 생겼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신라에서의 불교 공인에는 보다 탐구적·구도적 자세가 엿보인다. 고구려의 불교는 지배자들의 몰이해로 큰 구실을 하지 못하고 승려들은 신라나 백제, 또는 일본으로 가 그 뜻을 폈다.

      백제의 승려들은 백제 멸망과 더불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화를 꽃피웠다. 신라에서는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자기 종파적인 사상의 이해에서 탈피하여 불교사상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이론체계가 세워짐과 아울러, 대중불교의 성격이 나타나면서 그 기반이 확대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는 이러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보살도(菩薩道)로 훈련된 청년 엘리트와 국왕과 대신·장군들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신라의 정치이념도 화엄사상(華嚴思想)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경제·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의 활동도 화엄을 비롯한 법화(法華)·열반(涅槃)·능가(楞伽)·기신(起信)·승만(勝)·유마(維摩)·반야(般若) 등 대승경론(大乘經論)의 철학이 원광(圓光)이나 자장(慈藏)·원효(元曉) 등에 의해 보급됨으로써 찬란한 개화(開花)를 하였다.

      한국 민족이 세계에 자랑하는 찬란하고 존귀한 문화유산은 대개가 이때의 사상과 신심(信心)의 뒷받침 아래 이룩된 것들이다. 석굴암과 불국사(佛國寺), 상원사(上院寺)·봉덕사(奉德寺)의 종(鐘),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 기타 국보들이 모두 신라불교문화의 편모를 보여주고 있다. 고려 시대에도 국가의 보호 아래 불교는 번영을 누렸다. 태조는 사찰을 세워 불교를 숭상하고 연등회와 팔관회 등을 개최하였으며, 광종 때에는 과거제도에 승과를 두고 급제자에게 법계를 주어 그 권위를 높였다. 그러나 당시의 불교는 바람직한 개혁으로 쇄신되지 못하고 도참사상(圖讖思想)을 강조하기에 이르렀으며, 교리(敎理)의 연구를 통해 보살도의 실천을 강조하는 어려운 길을 버리고 모두가 안이한 밀교적(密敎的) 주술만을 강조하는 의식주의(儀式主義)로 일관하였을 따름이다.

      그러한 가운데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나타나 천태종(天台宗)을 창시하고 이론과 실천 양면을 강조하는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제창하였으며, 원효정신의 재흥(再興)을 꾀하여 또 하나의 민족적 위업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완성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도 당시 불교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실천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여기에 바탕이 되는 이론이 돈오점수(頓悟漸修)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간섭기에 접어들면서 불교계의 혁신운동은 단절되고, 당시 불교사찰이 권문세족의 후원 아래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는 등 세속화되어, 고려 말의 불교는 성리학을 수용한 신진사대부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부패와 타락은 결국 조선왕조의 출현과 더불어 숭유배불(崇儒排佛)을 공식적으로 정책화하게 만든 주원인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억불정책(抑佛政策)으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고 또 7종파를 선(禪)·교(敎) 양종으로 통합, 사찰의 건립도 억제하였다.

      불교가 국가의 지도이념으로서의 지위는 잃었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신봉되어 그 사회적 기반을 유지하였다.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임진왜란 때에는 결연히 궐기하여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위해 왜적을 무찌르고 난국을 극복한 것은 호국(護國)·호민(護民)·호법(護法)의 강인한 전통을 이어받은 결과였다. 개화기의 한국 불교는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에서는 벗어났으나 일제강점기에는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말미암아 일본 불교에 예속되었다. 이에 한용운(韓龍雲) 등과 같은 인사들은 ‘조선불교유신론’을 내세워 불교의 자주성 회복과 쇄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500여 년에 걸쳐 탄압과 멸시와 푸대접으로 모든 발전과 개혁의 자유활동을 폐쇄당해 인습화된 한국 불교를 유신(維新)하고자 한 그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다. 광복 후 한국 불교가 맞이한 정세는 역시 그 유신을 가능하게 할 만큼 좋은 사정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8·15광복 후 1950년을 지내 오는 과정에서 한국의 불교계는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1970년대에 일대혁신운동을 일으켜 승려의 자질 향상, 교육의 쇄신, 포교의 다양화 등을 추진하였으며, 세계불교연합회를 창설하여 한국불교의 지도력과 공신력을 높였다. 현재 한국 불교 주요 종단으로 조계종(曹溪宗)과 태고종(太古宗)이 있고, 그밖에 법화종(法華宗)이 두 파, 총화종(總和宗)·천태종·진각종(眞覺宗)·일승종(一乘宗)·불입종(佛入宗)·정토종(淨土宗)·화엄종(華嚴宗)·보문종(普門宗)·법상종(法相宗)·용화종(龍華宗)·원효종(元曉宗)·진언종(眞言宗)·천화불교(天華佛敎)·미륵종(彌勒宗) 등 25개 종파가 있다. 1995년 불교인 수는 1032만 1012명으로 1985년의 805만 9624명보다 28% 늘어났다. 2005년 현재 불교인 수는 1072만 6463명이다. 2015년에는 불교인구가 761만 9천으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불교 인구의 전반적인 고령화가 원인으로 꼽힌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불교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SNUAC))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불교의 전래 ~

      ①고구려~소수림왕 2년(372년) ②백제~침류왕 원년(384년) ③신라~법흥왕 14년(527년)에 전래됨.

      원래는 하느님(칠성님)을 모시는 고유종교인 "선교"가 있었는데, 불교의 전래이후 부터, 점차적으로 민족종교인 선교가 소멸되므로, 불교가 선교를 삼신각으로 흡수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땅과 바다(즉, 지구)를 창조한 후, 태양을 창조했다는, 지구 중심적 천동설로 우주를 창조했다는, 야훼신은 가짜 창조주인데, 우리 한민족 고유의 하나님 이름을 도적질하여 사용하는 가짜 하나님일 뿐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진리라 말하는 성경의 진실과 문제점 성경 구약과 신약" 블로그를 참고하세요.

      가야불교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고려시대에 쓴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는, 김수로왕이 김해 가야를 세웠고, 허황옥이 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배를 타고 가야로 건너와, 김해 가야의 왕후가 되었다고 한다.

      가야불교는 육로의 삼국보다 빠른, 밀양 만어사는 김수로왕 당시에 창건했다고 하며, 밀양 부은사는 가야 2대왕인 거등왕이 아버지 수로왕의 은혜를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고 전해진다(수로왕은 199년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또 하동 칠불사는 김수로왕의 7왕자가, 외삼촌인 장유화상을 따라 스님이 되어, 2년만에 모두 성불하였다는 것을 기념하여 세운 사찰이라고 한다. 이 칠불사에는 통일신라시대에 건축한, 한번 불을 때면 100일간 온기가 지속된다는 "아자방"의 신라식 온돌이 유명하다(경남지방유형문화재 144호)

      원본 불경의 언어 ~ 남방불교의 원전은 대부분 "팔리어"로 쓰여졌고, 북방불교의 원전은 대부분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졌음.

      ①팔리어(성전어)~인도 아리안 계통의 언어로, 인도서쪽지방의 일반 민중이 쓰던 언어. 스리랑카로 전해진 상좌부불교가 동남아시아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팔리어"는 성서러운 언어라는 뜻의 성전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됨.②산스크리트(범어)~인도 아리안 계통의 언어로, 상류층이 쓰던 고상한 언어. 대중부불교가 중국등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한자권에서는 경전의 "산스크리트어"를 상류층, 천상의 언어라는 의미로 "범어"라 번역함.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불교가 처음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재위 371~384) 2년인 372년으로,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다.

      -출처:위키백과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에 맨처음 불교가 전래된 것은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17대왕인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즉, 서기 372년의 일입니다. 이해 2월에 중국의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나라인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라는 스님으로 하여금 불상과 경전을 보내옴으로써 공식적인 불교의 전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2년 후에는 아도(阿道)라는 스님이 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라는 최초의 사찰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간의 공식적인 전래로서, 그 이전에 민간 차원에서는 이미 불교가 이미 들어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