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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빙
비비빙23.06.21

독일 나치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책이나 영화에 독일 나치 라는게 많이 나오는데 나치라는것은 무엇이며 역사적인 배경과 왜 사용하는지 자세히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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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치(Nazi)는 본래 이 정당에 대한 멸칭이며, 스스로를 부른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으로, 공식 약칭은 NSDAP이다. 국가(혹은 민족), 사회주의, 노동자 3글자가 합쳐진 정당의

    명칭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스스로를 부른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입니다.

    나치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농민, 회사원 등의 일반 근로자에게 해외 여행을 제공하기 위해 대형호화여객선인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를 건조하는 등 노동자를 위하는 모습을 보이고자 하나 실제 사회주의와는 전혀 다른 정책을 시행, 오히려 노동탄압을 자행했습니다.

    1934년 독일 대통령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사망 후 총리였던 아돌프 히틀러가 대통령까지 겸임하면서 본격적으로 독일 전체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1938년 오스트리아를 강제 병합하고 체코슬로바키아도 정복, 일본제국, 이탈리아 왕국과 3국 동맹을 맺고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 후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을 시작했으며 존속기간동안 안슐루스와 뮌헨협정,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유럽의 여러나라들을 병합, 침공하거나 국토를 강탈, 유대인과 집시족 등 수많은 인종들을 대량학살했습니다.

    현재 독일은 나치를 찬양하거나 나치의 상징물을 사용하는 자들을 형법에 따라 처벌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치 혹은 나치당은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독일의 국가사회주의계열 정당으로, 정식명칭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입니다.

    당시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를 필두로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으며, 그 과정에서 유대인과 집시족 등을 상대로 한 홀로코스트 및 많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치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의 줄임말입니다. 이 나치는 전체주의와 팽창주의를 선호하여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이며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대량학살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독일은 또 다른 나치의 출현에 대한 경계를 하고 매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반성하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ㆍ1889~1945년)가 주도했던 독일의 파시즘 정당. 정식명칭은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ㆍNSDAP)이지만, 흔히 나치(Nazi) 또는 나치스(Nazisㆍ나치의 복수형)로 불린다. 나치스는 정식 당 명칭이 아니라 히틀러 반대세력이 얕잡아 부른 비칭(卑稱)이다. 과거에는 정식 당명의 맨 앞에 있는 ‘Nationalsozialistische‘를 ‘국가사회주의‘로 번역해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으로 표현했으나, 최근 학계에서는 민족사회주의로 번역하고 있다. 나치즘이 국가보다는 인종(아리아)과 민족(게르만)의 우월성을 더 강조하고 있는데다, 반(反)유대주의가 나치즘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치스의 전신은 독일노동자당이다. 자물쇠 제조공 출신인 안톤 드렉슬러(Anton Drexlerㆍ1884~1942년)가 1919년 1월 뮌헨에서 창설했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독일을 옥죄던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던 독일인들이 주로 가담했다. 같은 해 9월 군인이었던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을 조사하라는 상관의 명령을 받고 뮌헨에서 열린 당대회에 참석했다가 드렉슬러의 권유로 당에 입당했다. 히틀러는 뛰어난 연설로 곧 당원들을 휘어잡았다. 그는 1920년 초 독일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가 됐다. 이어 같은 해 2월 24일 대중집회에서 당 명칭을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으로 바꾸고 베르사유 조약 타도,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 민주공화제 전복, 독재정치의 수립, 다국적기업 공격, 군비 확장 등을 포함한 25개 조의 나치스당 강령을 발표했다.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ㆍ1883~1945년)가 이끄는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의 로마 진군에 자극 받은 히틀러는 1923년 11월 8일 뮌헨에서 공화정부에 맞서 폭동을 일으켰으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하고 당도 사실상 해체됐다. 6개월 간 투옥됐다 풀려난 히틀러는 흩어진 당원들을 다시 모아 당 재건에 나섰다. 1929년 대공황으로 기업들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급증하자, 독일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사회주의적 슬로건을 내세우며 대중 선동에 나섰다. 그 결과 군부와 관료, 자본가, 중소 농민 및 실업자 등의 지지를 받아 1932년 총선에서 제1당으로 부상했다. 1933년 1월 30일 총리로 임명된 히틀러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철저히 탄압한 뒤 같은 해 7월 일당독재의 기반을 확고히 구축했다.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모든 정당을 해체하고 바이마르 헌법을 폐지했으며,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군대를 재정비했다. 제3제국(das Dritte Reich)의 출발이었다. 히틀러는 신성로마제국(제1제국)과 1871년 통일독일(제2제국)에 이어 자신이 수립한 나치독일 체제를 제3제국으로 칭했다. 히틀러는 1939년 8월 1일 선전포고 없이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듬해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 벨기에를 차례로 점령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미국의 참전과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기울어진 뒤 1945년 5월 연합군에 항복했다. 히틀러는 독일이 항복하기 직전인 4월 30일 권총 자살했다.

    나치스의 당원 수는 1920년 약 2,000명에 불과했으나, 히틀러가 정권을 탈취한 1933년 250만명으로 급증했다. 1945년 연합군에 의해 당이 해산될 무렵 나치스의 공식 당원은 850만명에 달했다. 나치스의 일반 당원은 주로 중산층과 농민, 산업노동자, 교사 등이었다. 독일이 항복한 직후 나치스는 사실상 해산됐으며, 1945년 9월 10일 법률에 의해 활동이 금지됐다. 2차 대전 전범들이 기소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스는 범죄조직으로 인정됐고, 이른바 반(反)나치법에 의해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이라는 명칭은 법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나치스의 상징인 갈고리십자를 포함해 제3제국과 관련된 상징물을 일상에서 사용하는 것도 법으로 금지돼 있다. 독일은 나치스의 전쟁범죄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성하고 있다. 독일정부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스와 독일 군수기업에 징용됐던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책임을 위해 2005년 100억 마르크(약 5조원)를 들여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나치스는 정규 국방군과 경찰 외에 준(準)군사조직인 친위대(SchutzstaffelㆍSS)와 돌격대(SturmabteilungㆍSA)를 운영했다. 친위대는 1925년 4월 히틀러 개인경호부대로 창설됐다. 300명 규모로 시작해 1933년 나치스 집권 무렵에는 5만명, 1939년에는 25만명까지 늘어났다. 이처럼 인원이 크게 늘어나 일반 정규군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인식되자, 1940년 무장 친위대(Waffen-SS)로 개칭했다. 돌격대는 1921년 나치스 대중집회의 경호원 모임이 조직화한 것이다. 나치스 집회의 경비와 집회를 방해하는 공산당 등 반대 정당에 대한 대응, 당 간부의 신변 경호 등을 맡았다. 1933년 돌격대 대원 수가 200만명으로 급증하고 과격 양상을 띠자, 히틀러는 1934년 6월 30일 친위대를 시켜 에른스트 룀 (Ernst Roehm) 등 돌격대 간부들을 숙청했다. 이른바 ‘장검의 밤 사건’이다. 이후 돌격대는 친위대에 밀려 정치적 지위가 크게 낮아졌으며, 2차 대전 중에는 국방군을 보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나치스는 이밖에 나치 여성단(NS-FrauenschaftㆍNSF), 히틀러 청소년단(Hitler jugendㆍHJ), 독일소녀단(Bund Deutscher MädelㆍDBM) 등 여성 및 청소년 조직을 결성해 대중운동을 전개했다. 나치스가 1926년 7월 나치즘 교육을 위해 설립한 히틀러 청소년단은 넥타이가 없는 갈색 셔츠를 제복으로 착용했으며, 10세에서 18세까지의 청소년들이 가입 대상이었다. 청년노동자와 학생, 실업자 등으로 구성된 단원들은 스포츠와 사상교육으로 무장하는 한편, 나치즘을 전파하기 위한 시위ㆍ선동 활동에 동원됐다. 대원 수는 1930년대 초 10만명 정도였으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 1933년부터 급증해 2년 뒤에는 약 360만명으로 늘어났고, 1936년 7월 1일 이후에는 모든 남녀 청소년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국가기관이 되었다. 10번 째 생일을 앞둔 독일 소녀들은 관청에 등록해 인종 검사를 받았으며, 여기에서 순수 아리아인종으로 판정되면 독일소녀단(10~14세)에 가입했다.

    출처 :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찌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라고 번연되며 독일어로 '나치'( Nazi [ˈnaːtsi], 단수 및 접두사) 또는 '나치스'([ˈnaːtsis], 나치의 복수형)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 나치라는 줄임말을 널리 사용하고 있습니다. 국명의 Nationalsozialistisch를 ‘국가사회주의’로 번역하느냐 ‘민족사회주의’로 번역하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독일어 단어 ‘Nation’은 국민, 국가 또는 민족을 뜻하는 낱말이고 히틀러가 바로 이 나찌당을 이끌면서 2차 대전의 주범이 됩니다.


  •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NSDAP)이다. 나치스란 원래 정적(政敵)들이 만들어 낸, 얕잡아 부른 명칭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이 말이 전세계의 통칭이 되었다.

    19세기 말엽 유럽에 일반적으로 공통되어 있던 반(反)유대주의 ·백색인종지상주의·국가주의·제국주의 및 반(反)사회주의와 반(反)민주주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발생하였다.

    중심이론은 독일민족지상주의와 인종론이다. 즉, 게르만족은 인류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종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을 지배할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와 반대로 가장 열등하고 해악적인 인종은 유대인으로, 그들은 아무리 환경을 개선하고 교육을 실시하더라도 그들의 천성적인 열등성과 해악성은 개선되지 않으며, 항상 주위환경을 부패시키거나 또는 해악을 만연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우수한 민족은 그들의 열악성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을 격리시키거나 또는 절멸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본래 나치스의 근본사상은 국가주의적 경향, 중산계급과 지식인의 반민주주의적 ·권위주의적·민족주의적 경향, 특히 군부·관료·경영진·교회·교육계 등 사회 일반에 통하는 권위주의적· 군국주의적 전통과 강렬한 국가주의 사상이었고, 나치스의 지지자로서는 항상 몰락의 위협을 받고 있던 중산계급이 중심이었으며, 거기에 다시 군인으로 복원된 병사·장교와 중소농민, 노동조합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 ·점원 ·실업자 등이 참가하여 나치스의 대중적 기초를 이루었다. 또한, 대자본가층이나 보수파 및 군부 등도 나치스와 공통의 목적, 즉 계급투쟁의 배격, 강대한 독일의 건설, 군비의 대확장과 군국주의적 국가건설, 독재정치의 수립, 경제발전, 민주공화제의 전복, 독일의 유럽 제패 등의 주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치스를 지지하였다.

    1919년 1월 안톤 드렉슬러에 의하여 독일노동자당이 결성되고, 1920년 2월 24일 대중집회를 열어 25개조의 당강령을 공포하였다. 1921년 7월 임시 당대회에서 히틀러의 독재적인 지위가 확립되었고, 당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 국내의 혼란을 틈타 남부독일의 바이에른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그것은 바이에른의 군부와 보수왕당파 및 대자본가 등이 후원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힘입은 히틀러는 1923년 11월 8일 바이에른 보수왕당파와 군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독재제도를 수립하려고 공화정부와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때는 시기가 일러 군부 ·경찰 ·관료 등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으며, 이로 인하여 당도 한때 금지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당은 1925년 2월 재건되었으며, 그후 히틀러는 합법주의를 지키면서 히틀러-유겐트(Hitler-Jugend:나치스청년단) ·나치스학생동맹 ·나치스돌격대(SA) 등 대중조직을 발전시켜 독일의 국민적 전통과 민족주의적 풍조에 합치하는 대중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사회주의적 슬로건을 강조하였다. 세계적 경제공황의 혼란기에 국민의 다수가 나치스의 힘에 의하여 강대한 독일을 재건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지지를 받아 독일의 제1당이 되었다. 이때부터 군부와 대자본가, 각종 압력단체 ·관료층 및 농업계까지도 나치스를 지지하게 되었으며, 진정한 뜻으로의 반(反)나치스파로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청년부 등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마침내 합법적인 총리로 임명되어 독일 제3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독일의 관료층 ·군부층 ·경영진 ·압력단체 등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나치스의 정권획득은 기정사실이 된 것을 의미하였다. 국내 각 방면 유력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은 히틀러는 보다 강력하게 경제적 ·정치적 시책을 감행하여 나갔다. 1933년 초 600만 명을 넘었던 실업자들을 군수산업과 토목사업에 거의 흡수시켰으며, 농업면에서는 세습농장법을 제정하여 대농과 중농을 보호하였고, 또한 식량의 자급자족화를 도모하였다. 공업면에서는 인조석유 ·인조고무를 비롯하여 대용품 생산에 힘을 기울였으며, 종래의 노동조합을 폐지시키고 노동자를 자본가 ·기술자 등과 함께 새로 조직된 독일노동전선에 가입하게 하였다. 정치면에서는 1당독재를 실시하였으며, 나치스친위대(SS)를 강화하고, 비밀경찰로 하여금 정보를 위한 기관으로서 전국민을 감시하게 하였다. 또한 유대인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를 강제수용소에 수용시켜 혹독한 학대와 살육을 자행하였다. 교회 ·군대 ·학교 등도 나치스식으로 획일화시키고 일반 국민도 나치스 신봉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반(反)나치스 저항운동은 1936년이 되자 거의 그 자취를 감추었다.

    국제관계에서는 1933년 10월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1935년 1월 자르지방의 인민투표에서 승리하여 이 지방을 독일영토로 복귀시켰으며, 3월 국민징병제를 채용 ·실시하여 육군을 일시에 5배로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6월에는 영국-독일해군협정 체결에 의해서 해군도 4배로 증강하였다. 1936년 3월 독일군을 라인 비무장지대로 진주시켜 독일-프랑스 국경지대를 요새화하였다. 이처럼 독일의 실력이 유럽세계를 제압하게 되자 독일국민의 나치스에 대한 신뢰도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실력을 배경으로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강제적으로 독일에 병합시키고, 10월 체코의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합병시켰으며, 이어 1939년 3월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정복하여 독일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히틀러는 여세를 몰아, 9월 폴란드에 단치히 자유시(自由市)를 독일에 반환할 것과 동(東)프로이센과 독일 본토를 연결하기 위하여 폴란드령 포메른을 경유하는 치외법권적인 도로와 철도의 건설을 인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폴란드로부터 거절당하였기 때문에 폴란드 침입을 감행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나치스는 폴란드와 구소련을 멸망시키고 그 지방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종족인 게르만족의 생존권(生存圈)으로 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었다. 나치스는 1945년 패전으로 연합군에 의하여 금지되고, 그 금지조치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