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오군 체제는 어떤 정비체제였나요?
안녕하세요. 속오군 체제는 과거에 어떤 정비체제,제도였나요? 속오군 체제의 특징과 장점 그리고 단점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방은 만방 : 비변사, 5군영, 속오군
건국 초에 정비된 조선의 근세적 통치 체제는 16세기 중엽 이래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에는 한층 더 흔들리게 되었죠. 이에 조선 왕조는 사회가 변화하고 통치 질서가 개편되는 대대적인 변화를 맞게 됩니다. 정치기구에 있어서는 비변사의 기능이 확대되었고, 군사 제도에 있어서는 새로이 5군영 체제가 갖추어졌으며 속오군 체제로의 개편이 일어납니다. 비변사는 원래 왜구와 여진족 침입에 관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중종 때 설치한 임시기구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국방이 강조되는 시기를 맞아 16세기 중엽에는 비변사가 상설기구로 자리 잡이게 되었고, 왜란을 겪으면서 비변사의 기능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국가적 어려움을 수습하기 위해 문무 고위 관리들이 한자리에 모여 의논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 뒤 여러 가지 사회적 혼란으로 정세가 어수선해지자 국방 문제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들까지도 비변사에서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비변사는 조선 후기에 국정을 처리하는 상설합의기구로 변화합니다. 초기에는 지변사 재상(知邊事 宰相)을 중심으로 군사 문제를 처리하는 기관이었던 비변사가 이제 문무 고위 관리들, 즉 정승과 각 조 판서들(6조 가운데 공조는 제외), 5군영 대장들, 유수(수도인 한성 주변의 4개 도시의 시장), 대제학 등이 모여 국정을 의논하는 기관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말 대원군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계속됩니다.군사 제도의 개편도 불가피했습니다. 15세기에 정비되었던 중앙군은 5위제였는데, 이는 왜란 이전에 이미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습니다. 왜란 이후로는 아예 무너져 버렸지요. 이에 정부는 왜란 중에 훈련도감을 설치했습니다. 이것은 급료를 받고 복무하는 직업적인 상비군으로 조직된 용병제를 토대로 한 군대였습니다. 농민을 군역의 의무에 따라 징발하던 것과는 매우 다른 형태입니다.
훈련도감의 군병은 포수(총병) · 사수(활병) · 살수(창검병)인 삼수병으로 편제되었습니다. 훈련도감에 이어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어영청 · 총융청 · 수어청이 설치되고, 금위영까지 창설되어 모두 5군영 체제가 갖추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조선 후기의 중앙군인 5군영은 일관된 계획 아래 일률적으로 편성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시간의 차이를 두고 마련된 제도입니다.2)
5군영은 국방력 강화라는 명분으로 설치되었지만,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인조 반정 뒤에 정권을 장악한 서인들이 자신들의 군사적 기반으로서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고 이를 장악한 것입니다. 이 당시 서인은 붕당 정치를 내세워 남인들과 유대 관계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권력을 나누어 가질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정권을 더욱 튼튼히 하고자 했고, 이를 위한 군사적 기반으로 새로운 군영을 마련한 것이죠. 지방군제는 조선 초기의 방어 체제인 진관 체제가 무너지고 제승방략 체제로 변하게 됩니다. 진관 체제는 각 요충지마다 설치된 진관을 중심으로 적을 막아내는 방식입니다.
말하자면 군현 단위의 방위 체제인 셈이죠. 마을 단위의 방위 체제이므로 적군이 대규모일 때는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입니다. 이것은 방어가 필요한 곳에 병력을 동원하는 체제였습니다. 하지만 왜란이 일어났을 때 별로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이에 새로 마련한 제도가 속오군 체제입니다. 진관을 복구하고 속오법에 의해 방위 체제를 갖춘 것입니다. 즉 양반으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속오군(束伍軍)으로 편제하고, 속오법에 따라 훈련을 받게 했습니다.
속오군은 농한기에 훈련을 받았는데, 평상시에는 향촌을 지키며 생업에 종사하고 유사시에는 전투에 참여하는 형태였지요. 일종의 예비군 체제로서 외적이 침입했을 때 신축성 있게 대처하도록 한 제도입니다. 속오군에는 양반과 노비가 함께 포함되었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군역은 양인의 몫이었고, 양반과 노비는 모두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나 속오군 체제에서는 이들이 모두 군역 대상자로 포함된 것입니다. 노비 입장에서는 신분이 상승한 것이지만, 양반들은 양인과의 구별이 흐려지게 된 것이죠. 결국 속오군 체제는 신분제 동요를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네이버 지식백과] 국방은 만방 : 비변사, 5군영, 속오군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 2009. 2. 5., 김아네스, 최선혜)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승방략은 임진왜란 때 털리게된 전략이라 파기하고 이전의 진관체제로 복구한거임
속오군은 양반에서 양민,천민까지 5명을 한팀으로 묶은 군대이구요 이것도 임진왜란 때 만든거임
정리하자면 진관은 전략체계이고
속오군은 부대 편성 체계임
임진왜란전에 왜구나 여진족들의 소규모 부대가 특정지역을 침탈함
효율적 제압을 위해 기존의 진관체제에서 제승방략체제로 바꿈
진관 : 중요지점에 진을 치고 거기를 지킴
제승방략제: 작전지점에 병사를 집결시켜 적을 제압함
임진왜란 때에는 전면전이라 병사를 한쪽으로 집결시켜 버리면 후방이나 다른쪽이 비어 버려서 한번 뚤리면 뒤쪽까지 텅비어 버림 후속조치나 이런거 할 겨를이 없음. 그리고 집결된 군대의 지휘관을 중앙에서 파견했는데 지휘관 기다리다 오합지졸처럼 털리기도 함.
한마디로 실패한 전략 그래서 다시 진관체계로 복구함
임진왜란때 병사가 부족하니 양반이고 천민이고 할 것 없이 군인으로 편성. 5명으로 묶어 한팀을 만듬 이게 속오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