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서호진 전문가입니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흔히 소인국과 거인국 에피소드만 발췌되어 아동용 동화로 소비되곤 하지만, 원작은 당대 영국 사회와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신랄한 풍자 소설입니다.
1부 소인국인 릴리퍼트에서는 굽이 높은 구두를 신는 당파와 낮은 구두를 신는 당파 간의 무의미한 정치적 파벌 싸움이 등장합니다. 또한 달걀을 넓은 쪽으로 깰 것인가, 좁은 쪽으로 깰 것인가 하는 사소한 교리 논쟁으로 인해 이웃 나라인 블레푸스쿠와 참혹한 전쟁을 벌이는 모습을 통해 정치 및 종교적 대립의 허망함을 조롱합니다.
2부 거인국인 브롭딩나그에서는 인간의 육체적 추악함과 도덕적 결함이 거인의 크기만큼이나 확대되어 묘사됩니다. 걸리버는 이 나라의 왕에게 유럽의 찬란한 역사와 화약, 대포 같은 무기 기술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지만, 왕은 도리어 유럽인들을 자연이 낳은 가장 혐오스러운 벌레 같은 족속들이라며 맹렬히 비판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의 오만함과 문명의 폭력성이 도마 위에 오릅니다.
대중에게 자주 생략되는 3부의 여러 나라에서도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계속됩니다. 공중을 떠다니는 섬 라퓨타와 그 지상의 영토인 발니바르비에 위치한 라가도 아카데미에서는, 오로지 사변적인 학문과 비현실적인 연구에만 매달리다 국토를 황폐하게 만들고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지식인들의 맹목성을 풍자합니다. 또한 럭나그라는 나라에 등장하는 스트럴드블럭이라는 불사 인간들은, 늙고 병든 육체와 쇠퇴한 지능을 가진 채 죽지 못해 영원한 고통과 탐욕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 영생에 대한 인간의 허망한 욕망을 꼬집습니다.
각 여행을 마칠 때마다 걸리버가 겪는 정신적 후유증은 4부에 이르러 극명한 인간 혐오로 정점을 찍습니다. 철저히 이성적이고 고결한 말들의 종족인 휴이넘과, 그들의 지배를 받으며 본능과 탐욕, 오물 속에서 살아가는 야만적인 짐승 인간 야후 사이에서 걸리버는 극심한 혼란을 겪습니다. 자신을 비롯한 인류 역시 추악한 야후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걸리버는 영국으로 귀환한 후에도 인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그는 가족의 체취마저 견디지 못해 아내를 피하며, 결국 마구간에 은둔하여 자신이 사 온 말들과만 대화하며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