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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로운꿀벌98
호화로운꿀벌9823.12.18

동화작가 권정생님의 작품들은 무엇이고 어떻게 평가받고 있나요

몽실언니라는 책을 읽게되었는데요 권정생이라는 작가더라구요 이분의 직품들은 무엇이 있고 이분의 작품은 어떻게 평가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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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1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강아지똥, 사과나무밭 달님, 점득이네, 밥데기 죽데기,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 별똥별, 무명저고리와 엄마, 몽실언니....등 아주 많이 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이며, 생태주의자이고, 기독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로도 평가받고있습니다. 사람 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슬프고 괴롭고 어려운 현실이지만 그래도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은 성실하고 열심히 잘 살아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있으며 인간의 무한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희망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삶과 문학이 한 몸을 이룬 작가로 일제강점기 해방 6.25전쟁 등을 두루 체험하면서도 어느 한쪽의 이념이나 사상에 치우치지 않고, 왜곡된 역사인식과 시대의식을 작품에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자기희생적 삶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인사 덕분에 타계 이후에도 작품뿐 아니라 그 의 삶 전반이 여전히 영향력이 큰 작가로 남아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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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 제국의 도쿄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귀국했다. 조선인연맹에 가입해있던 친인척 둘은 나중에 뒤따라 오기로 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아 평생 생사를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귀국 후에도 살림이 무척 어려워서 국민학교도 겨우 졸업했고, 또한 바로 나무 장수, 고구마 장수, 임노동자 등의 궂은 일을 하며 성장했다.

    19세 때 그는 폐병에 걸려서 항생제를 보급받기 위해 읍내 보건소를 찾아갔으나 공급이 제대로 되질 않아 허탕치는 날이 많았으며, 같이 폐병을 앓던 고향친구들이 하나둘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의 병세는 점점 심해져서 폐결핵과 늑막염을 거쳐 신장결핵과 방광결핵으로 인하여 온 몸이 망가져버려서 사람 구실을 못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평생 오줌통을 몸에 차고 살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 부모님마저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집도 없고 기댈 곳도 없어진 그는 1967년 경상북도 안동군(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일직교회 부속의 토담집에서 기거하며 종지기를 하게 되었다. 생활은 여전히 조악해서, 여름이면 소나기에 뚫린 창호지 문 구멍 사이로 개구리가 들어와 울고, 겨울이면 생쥐들이 들어와 발가락을 깨물거나 옷속을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들 정도였다고 한다. 처음엔 깜짝 놀라고 귀찮았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고 나중에는 아랫목에 먹을 것을 두고 생쥐들을 기다릴만큼 정이 들었다고 한다.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똥》을 발표하여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아동문학상을 받으며 동화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고, 1975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1984년부터 교회 뒤편의 빌뱅이언덕 밑에 작은 흙집을 짓고 혼자 살며 꾸준히 창작을 했다.

    1981년작 몽실 언니 등의 베스트셀러를 쓰면서 수억원에 이르는 인세를 매년 받았으나, 정작 산골의 흙집에서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고, 옷도 단벌이어서, 이웃 사람들은 그가 굉장히 가난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의 사망 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과 그가 남긴 재산에 대해 알고서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사실 여기엔 어두운 뒷 이야기가 있다. 출판사에서 지급한 권정생의 인세가 작가에게 전달되지 않고 중간에 사라진 것. 출판사와 권정생 사이에 있던 아무개가 착복한 것이다. 이 일에 대해 아무개는 "권정생은 워낙 순수한 사람이라 돈이 있어도 쓸 줄 몰라 주지 않았다"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금전에 무지한 권정생이 훗날 유언장에 유산에 관한 부분을 남기게 된 사연이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연 선생께서 정말로 모르셨을까?

    사망 2년 전에 작성한 유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 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쯤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위 세 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남긴다는 것이 무척이나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낭만적으로 삶을 마감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췄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것은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에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 1일 쓴 사람 권정생


    그리고 타계 직전에 쓴 유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남북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티벳 어린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주세요.

    마지막 유언은 "어머니… 어머니 아아, 어머니…"였다고 한다.(권정생 위인전 참고)

    현재 그의 재산은 유언에 따라 권정생 어린이 문화재단에서 관리하며 남북한과 분쟁지역 어린이 등을 돕기에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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