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고부 농민 봉기는 어떤 사건에 의해 일어나게 된 것인가요?
1894년 고부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동학농민운동 시작되었는데
최초 고부 농민 봉기는 어떤 이유로 일어나게 된 것인가요?
그리고 고부 농민 봉기 이후 사건이 종결되지 않고
더 크게 번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부는 전라북도 정읍의 옛 이름이다. 조선 고종 때 이 지역의 군수로 조병갑이 부임했는데, 그는 백성들을 수탈하고 탄압하는 탐관오리였다. 조병갑은 갖가지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예를 들어 농민들을 동원하여 필요하지도 않은 저수지를 새로 만드는가 하면, 저수지의 물을 사용하는 대가로 세금을 거두는 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다.’거나 ‘가정이 화목하지 않다.’는 죄목을 씌운 뒤 벌금을 걷기도 했다. 그렇게 거두어들인 세금은 사사로이 사용했다. 품질 좋은 쌀에 해당하는 돈을 세금으로 받았으면서도 조정에 올려 보내는 세금은 나쁜 쌀을 기준으로 했으며, 자신의 아버지 무덤에 세울 비석을 마련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돈을 거두기도 했다.
이에 불만이 높아진 농민들이 여러 번 항의했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전봉준 등 농민 1,000여 명은 1894년 1월 10일에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조병갑을 몰아내고 관리들을 직접 벌했다. 농민들의 봉기에 놀란 조정은 즉시 조병갑을 파면하고, 새로운 군수와 사건을 조사하는 관리를 내려 보냈다. 새로 온 군수가 그간의 잘못된 일을 바로잡겠다는 약속을 하자 농민들은 봉기를 풀고 집으로 돌아갔다.
고부 농민 봉기는 동학 농민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고부 농민 봉기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인 이용태는 엉뚱하게도 모든 책임을 농민에게 돌리고, 주동자와 참가자를 찾아내서 가두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다시 봉기하여 조정에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는 동학 농민 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부 농민 봉기 - 고부 군수의 수탈에 저항하기 위해 일어난 농민 운동 (한국사 사전 2 - 역사 사건·문화와 사상, 2015. 2. 10., 김한종, 이성호, 문여경, 송인영, 이희근, 최혜경, 이승수)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외세의 경제적 침투와 정치의 혼란으로 농촌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은 여러 가지 부정을 저지르며 농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에 전봉준은 “탐관오리를 제거하여 백성을 구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농민들을 이끌고 관아를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곡식 창고를 풀어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 이것이 고부 농민 봉기로서, 동학 농민 운동의 시작이었다(1894).
-출처 우리역사넷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94년 1월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맞서 전봉준이 주도해 일으킨 봉기로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군민에 대해 수탈을 자행합니다. 특히 문제가 된것은 만석보의 수축으로 보를 새로 쌓는다는 명분으로 농민들을 동원하고 고율의 수세를 징수했습니다.
농민들은 전봉준을 찾아가서 관에 제출할 호소문을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고, 전봉준은 농민들과 함께 조병갑을 두 차례 찾아가서 호소문을 제출하고 수세 징수를 시정해 줄것을 호소하나 조병갑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에 전봉준은 1893년 11월 송두호의 집에 모여서 고부 관아를 공격하고 조병갑을 처단을 결정한 사발통문을 작성하게 됩니다.
전봉준은 1894년 1월 10일 약 1000여 명의 동학교도와 농민을 규합해 봉기했는데 봉기한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습격해 조병갑이 불법으로 수탈한 수세미를 군민들에게 돌려주고 만석보의 신보를 파괴하고 해산합니다.
한편 봉기의 기미를 알아챈 조병갑은 미리 전주로 피신해 전라 감사 김문현에게 농민 봉기를 보고했고 김문현의 보고를 받은 조선 정부는 조병갑을 파면하고 박원명을 신임 고부 군수로 임명하몄고 박원명은 농민군이 자진해서 해산하도록 조치합니다.
그러나 안핵사로 임명된 이용태가 봉기의 책임을 농민과 동학교도에게 전가 시키며 동학교도의 명단을 작성해 이들을 체포하고자 합니다.
이에 전봉준 등은 무장에서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보국 안민과 교조 신원을 위해 궐기할 것을 호소하고 1894년 4월 봉기를 단행합니다. 4월 봉기는 농민 뿐 아니라 동학교도들이 대거 결집하였으며 농민 항쟁이 고부라는 지역을 너어 보국안민과 반외세의 요구 아래 전라도 일대로 광범위하게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심해지고, 이로 인해 농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때 경주에서 최제우가 농민들의 마음을 읽는 민족종교인 동학을 창시하였다.
* 1860년 천주교에 대항하여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종교 '인내천'사상을 기본 교리로 삼아 사회적 차별을 반대하는 동학 창시함.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 평등을 주장한 동학, 이런 동학은 평등사회를 원하던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에 조정은 동학이 세상을 속여 백성들을 괴롭힌다는 혹세무민의 이유를 들어 최제우를 처형하고 동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동학은 계속 농민들 사이에 퍼져갔다. 그러던 중 동학농민운동의 발단이 된 사건이 전라북도 고부에서 발생하였다.
* 전라도는 곡창지대로써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매우 심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물자가 풍부한 전라도 고부에서는 군수 조병갑의 부정부패와 횡포가 매우 심하였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저수지인 만석보를 다시 쌓도록 해 백성들을 혹사시켰고, 그 저수지의 물에 세금을 붙여 강제로 수세를 거두어들여 자신의 재산을 늘렸다.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1894년 1월 전봉준을 지도자로 추대하였고, 몰락한 양반 출신인 전봉준이 전라도 고부 인근의 농민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봉기를 계획하였다.
1894년 1월 전봉준이 농민 1천여 명과 함께 고부 관아를 습격하였지만 조병갑은 이미 눈치채고 도망간 뒤였다. 이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을 풀어주고 횡포를 일삼던 아전들을 처벌하였으며, 관아의 곡식을 풀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수탈의 상징이던 만석보를 허물었다.
조병갑의 횡포에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이 사건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의 계기가 된 고부농민봉기였다. 이렇게 동학농민운동의 첫 시작은 단순한 농민 봉기였다. 그런데 이 봉기를 수습하기 위해 조정에서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는 봉기에 참여한 농민들을 동학 교도라는 죄목으로 잡아들이고 그 가족까지 체포하자, 농민들의 분노는 다시 거세졌다.
동학이 신분질서를 어지럽혀 눈엣가시였던 차에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그 원인을 동학교도들이 선동한 것처럼 꾸며 탄압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동학교도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그 해 3월에 농민들에 동학교도들까지 합세한 봉기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그 불길은 흥덕, 고창, 부안, 금구, 태인 등 전라도 각지로 퍼져 나갔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을 지휘부로 하는 동학농민군은 정읍의 황토현 그리고 장성의 황룡촌에서 관군과 격전을 벌였는데 이때 대나무로 만든 장태라는 무기를 굴려 최신 무기를 지닌 관군의 진영을 돌파해 승리했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전주성까지 함락시켰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정에서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청의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하자, 일본은 10년 전에 체결한 톈진조약을 구실로 인천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켰다. 일본군까지 개입되어 사태가 커지자 조정은 동학농민군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며 해산을 요구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청군과 일본군의 개입으로 생길 혼란을 막기 위해 외국 군대 철수와 탐관오리의 횡포 금지,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신분제도를 철폐, 과부의 재혼을 허락하는 등 사회적인 악습 폐지, 토지를 골고루 나눠 경작하는 토지제도 개혁을 골자로 하는 폐정개혁안을 제시했다.
조정은 이 안을 받아들였고 1894년 6월 동학농민군과 전주에서 화약을 맺었다.
전주화약을 통해 농민들은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라는 자치 기구를 설치하였다. 농민들 스스로 집강소를 운영하며 그들이 원하는 방향의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집강소는 농민 스스로 그 지역을 통치한다는 점에서 볼 때, 지금의 지방자치제도에 비교되는 매우 획기적인 결과였다.
※ 고부농민봉기부터 전주화약까지를 동학농민운동의 1차 봉기라고 하는데, 1차 봉기는 기존 사회질서에 대항하는 반봉건적 성격이었따면 2차 봉기는 반외세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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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 31년) 1월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맞서
전봉준이 주도하여 일으킨 농민 봉기입니다.
1892년에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군민에게 수탈을 자행하였습니다.
특히 만석보의 수축이었습니다. 보를 새로 쌓는다는 명분으로 농민들을 동원하고,
고율의 수세(水稅)를 징수한 것입니다. 농민들이 전봉준을 통하여 두 차례 호소문을 제출하고
수세 징수를 시정해 줄 것을 호소하였지만,
조병갑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인해 일으킨 농민 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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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농민봉기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 즉 가혹한 세금착취로 인해서 발생한 것입니다. 또 기세가 꺾이지 않고 더욱 더 확산하게 된 것은 조정이 개입하여 강제로 탄압하고 억압하려고 했던 것이 원인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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