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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안경곰70
아리따운안경곰7023.12.07

집성촌은 어느시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것인가요?

집성촌은 최근에는 찾기 힘들지만

아직까지 존재는 하는 촌락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집성촌의 형태는 언제부터 시작된 촌락구조인가요?

우리나라 역사에서 집성촌이 생겨난 시대는 언제이고

역사적 사료로 남아있는 집성촌의 공식적 기록은

언제부터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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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의 집성촌은 17세기 후반부터 나타난다. 삼국 시대에도 집성촌은 있었지만 유교가 보급된 조선 시대 중후반에 본격적으로 집성촌이 형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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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의 집성촌은 17세기 후반부터이며 삼국시대에도 있었으나 유교가 보급된 조선시대 중후반 본격적으로 집성촌이 형성됩니다.

    중국은 일찍이 종법질서가 확고히 자리잡아 역사가 오래된 집성촌이 많으나 한민족은 신라를 제외하면 부여 때부터 2000년 이상 남자가 처가에 살았고 고려때에도 유학을 근본으로 삼은 조선도 중기까지는 이러했으므로 하나의 마을에 다양한 성씨를 가진 사위가 유입되는 각정받이 마을이 전국적으로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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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의 집성촌은 17세기 후반부터 나타난다. 삼국 시대에도 집성촌은 있었지만 유교가 보급된 조선 시대 중후반에 본격적으로 집성촌이 형성된 것이다. 중국은 일찍이 종법질서가 확고히 자리잡아 역사가 오래된 집성촌이 많이 있지만, 한민족은 신라를 제외하면 부여 때부터 2000년 이상 남자가 처가에 들어가 살았다. 고려 때에도 그랬고 유학을 근본으로 삼은 조선도 중기까지는 그랬다.그래서 하나의 마을에 다양한 성씨를 가진 사위가 유입되는 이른바 각성받이 마을이 전국적으로 많았다. 저 아래에 언급된 하회마을과 양동마을도 원래부터 풍산 류씨와 월성 손씨, 여강 이씨가 대대로 살았던 게 아니라 17세기 그 마을에 있는 집안에 사위로 들어갔다가 사회 풍조가 변해 대대로 거기 살게 된 것이다.

    집성촌이 생기게 된 것은 양반들의 경제적 문제, 특히 재산 상속과 관련이 깊다. 유산 상속을 할 때 본래 남녀 관계 없이 균등하게 물려주는 게 전통이었는데, 부모는 두 명뿐인데 자녀가 여러 명이면 그만큼 재산은 흩어지기 마련이다.

    유럽에서 비귀족 시민들이 부르주아로 승급된 것과 같은 현상이 조선 후기에도 일어났는데, (예속민은 언제나 비참하지만) 평민 중 재산을 집적해 사회문제를 생각해 볼 여유가 시민 계급도 등장하고, 그 중에서는 재산이 분할되어가는 양반보다 재력이 우월한 경우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양반의 재산이 평민보다 적으면 당연히 위신이 설 수 없고, 양반들은 재산이 흩어지는 것을 방지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연장자 상속제 비슷한 형태가 도입되었고, 아들에게만 균분 상속하는 과도기를 거쳐 장남에게만 몰아서 장자 상속제가 도입된다. 이 과정에서 문중 재산과 집성촌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본래 조선은 양반의 기준을 재산이나 문벌이 아니라 생원진사시 합격자로 정해서 귀족 계급이 전사-지주나 성직-지주로 변질되는 병폐를 막으려 했으나, 여기까지 오면 평민 계급의 성장으로 탄생한 비귀족 지주를 이겨먹기 위해 귀족 지주가 생겨나고 이들이 서로 알력다툼을 벌이게 되면서 체제가 이점을 완전히 상실하고 패악만 나타나게 되었고. 이 시점에 와서는 성리학마저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면세 토지 집적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런 지주 간의 알력 문제는 현대까지 남아서 지긋지긋한 암덩이로 존속 중이다.

    달리 말하면 돈 주고 족보를 산다는 건 진짜 양반 족보를 사서 거기다 자길 끼워 넣는게 아니라 가짜 족보를 만드는 것이란 소리다. 양반들이 말이 좋아 족보를 팔았지 실상 식자층으로써 적당껏 서류를 조작해준 게 전부다. 집성촌 형성이 족보 판매보다 빨랐으므로 족보를 샀다고 가문에 슬쩍 끼어들어가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가짜 족보 여부 판단의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가 가문원이 어딜 자꾸 싸돌아다니는지 살피는 것. 조선 후기에 오면 유력가는 죄다 집성촌에 뭉처 살았기 때문에 이 동네 저 동네에 가문원이 흩어져 있다면 해당 족보가 가짜거나 가문이 완전 망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2] 그리고 나중에는 평민들도 양반처럼 가문원끼리 모여 집성촌을 만들어 살게 된다.

    이렇게 전국에 수많은 집성촌이 우후죽순 생겨나 한때는 인구 대부분이 집성촌에서 거주한 적이 있다. 하지만 도시화와 이촌향도, 그리고 댐 건설 등으로 마을이 없어진다거나 결정적으로 남북분단~6.25 전쟁 기간 동안 같은 마을 안에서도 이념으로 나뉘고 타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가 정착해버리는 등 전통적 향촌구조가 많이 파괴된 탓에 집성촌도 많이 없어졌다.

    지금은 양반문화가 강하거나 노인들이 많은 지방 농촌 지역에 집성촌이 많이 남아있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인근 도시로 나가 있거나 돌아오지 않아서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심하며 근근히 유지되는 곳이 많고, 이 때문에 집성촌에서 살거나 일하는 젊은이들의 태반이 중국, 동남아, 몽골,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등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집성촌이 더 이상 집성촌이 아니고, 오히려 다문화촌이 된셈이다. 생각 외로, 1980년대 후반 세대까지만 하더라도 집성촌이 있던 시골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상경한 사람들이 꽤 많다.

    다만 서울, 부울경은 비교적 적은 편인데 양쪽 지역 다 개발로 인해 집성촌 폐촌 비중이 높았고, 그나마 부울경 지역은 지리산권에 조금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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