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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살제수스
가브리살제수스23.03.24

비류라는 사람은 자살했다고 하던데 도시의 자랑거리가 되는게 맞나요?

안녕하세요


비류라는 사람을 보니


온조가 도읍을 정한 하남위례성(河南慰醴城 : 광주 廣州)보다 미추홀은 저습하여 살기에 적당하지 않으므로 백성이 흩어지자 백성과 온조에게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살했다.


인천 미추홀구에서는 비류문화의 도시라고 홍보하던데


이해가 안가서 여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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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비류는 온조왕의 형으로 미추홀에 터를 잡은

    초대 왕이자 마지막 군주기 때문에

    아마도 왕국을 건설하였던 곳이고 왕이였기

    때문에 더 그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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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비류(比流)는 고구려 시대에 살았던 왕자로, 왕족들 중에서 가장 인재가 있었던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는 철학, 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서 후세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았습니다.

    비류가 자살한 이유는, 그가 온조의 건축사업을 비롯한 정책에 반대했지만 이것이 이루어지자 더 이상 백성이 머무르기 좋은 곳이 아닌 미추홀을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러한 정책과 백성의 이동에 반대하는 심정으로 자살하게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천 미추홀구에서 비류문화를 홍보하는 것은, 비류가 미추홀에서 살았던 것과 그의 업적을 기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류의 자살과는 별개로 미추홀은 인천의 중요한 지역 중 하나로,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와 역사적 유산을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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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의 주몽에게서 난 두 형제 였지요. 비류가 먼저 백제 라는 나라를 세우고 온조는 십제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백제의 시조는 온조가 아니라 비류 입니다. 비록 나중에 자기 동생 온조보다 더 나은 국가를 만들지 못해 수치심을 느껴서 자살을 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자기가 돌보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책임감 떄무 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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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비류는 대한민국의 작곡가이자 가수로, 1996년 6월 6일 자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노래한 '서울이여 안녕', '아리랑' 등의 곡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중가요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가 남긴 대중가요와는 별개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가 남긴 곡들은 그의 추억과 함께 오랫동안 사랑받아지며 계속해서 전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죽음을 '도시의 자랑'이 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남긴 곡들은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의 죽음은 그가 남긴 음악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그의 음악과 추억을 함께 기억하고 간직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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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도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찾아보는데 내용은 많이 없네요..겨우 찾았습니다.^^

    비류는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여명왕이 죽은 후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고구려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왕위를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이후, 비류는 고구려에서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으며, 그의 삶과 업적은 고구려 후기의 정치, 문화, 군사,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현재, 비류는 고구려의 유물 중 하나인 비류방직이라는 실물로 그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비류방직은 대한민국의 보물 제26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자살 여부를 떠나서 그의 업적이 중요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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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의 왕자들입니다. 주몽의 뒤를 이어 부여에서 넘어온 유리가 태자에 임명되자, 비류와 온조는 그들을 따르는 10명의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많은 백성들도 함께 했다고 합니다.

    남쪽으로 내려와서 온조는 10명의 신하들의 추천을 따라 현재의 하남 위례성 부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지역으로 가기를 원했던 비류는 인천 미추홀 부근에 터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미추홀은 땅이 습하여 농사를 짓고 정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온조의 상황이 궁금하여 비류가 위례성에 가보자 그곳 백성들은 태평하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류는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자살을 하였다고도 하고 마음에 병을 얻어 죽었다고도 합니다.

    비류가 죽은 후 비류를 따랐던 백성들은 온조가 정착한 위례성에 합류하였고, 온조는 이들을 모두 받아들인 후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설화의 내용입니다.

    이 설화만으로 보면 비류는 습하고 소금기 있는 땅을 선택한 어리석은 왕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너무 단순한 인식입니다.

    온조 세력은 위험을 무릅쓰고 주변 세력들과의 경쟁하면서 나라를 세우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고, 그에 반해 비류는 위험보다는 안전하게 나라를 세우는 전략을 선택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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