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헤이한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요?
안녕하세요.
일본의 헤이한 시대는 어떠한 시대였나요?
헤이한 시대는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며
발전,전개과정이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헤이안 시대(일본어: 平安時代 へいあんじだい[*], 794년~1185년)는 794년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한 것으로부터, 가마쿠라 막부의 설립까지의 약 390년간을 지칭하는 일본역사의 시대구분의 하나이다. 교토에 세워진 헤이안쿄가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될까지 정치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헤이안 시대라고 한다.
나라 시대에 율령정치가 시작되어 헤이안 초기에는 천황의 통치가 이루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 승려의 세력이 커지면서 후지와라씨(藤原氏) 정권에 의한 부패가 횡행했다. 정치에 불만을 가진 하급귀족의 반란이 일어나고 도적들이 설치는 시대가 되고 있었다. 이들을 제압하려 커진 정치세력이 무사 계급이다. 귀족들을 대신해 무사의 정치가 시작되었고, 이런 상황은 가마쿠라 막부부터 에도 막부시기까지 700년동안 이어졌다.
헤이안 전기(前期)는 전 시대(나라 시대)부터의 중앙집권적인 율령정치를 기본적으로는 계승하면서도 부분적인 수정을 하였다. 하지만, 율령제와 현실의 괴리가 커지면서 9세기말 ~ 10세기초에 정부는 세입을 확보하기 위해 율령제의 기본이었던 개인별 지배체제를 고쳐, 토지를 대상으로 과세하는 지배체제로 크게 방침을 전환하였다. 이 방침의 전환은 민간의 유력자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이를 현지에 부임하는 필두 고쿠시(國司:수령(受領))가 총괄하게하여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왕조국가체제라고 한다. 왕조국가체제기는 보통 고대의 말기에 해당하지만, 분권적 성격을 띠는 중세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므로, 고대에서 중세로의 과도기라고 생각되고 있다.(일본문학사 연구에서는 중고(中古)라는 표현도 쓴다.) 모노노케, 음양사를 비롯한 미신이 크게 성행하였다.
왕조국가 체제하에서는 국가에서 토지경영이나 백성을 지배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유력한 백성(다토(田堵), 묘슈(名主))층의 성장이 나타나며, 그들의 통제하기 위한 이 권력위임과 병행하여, 국가에서 군사경찰권을 위임받은 군사귀족층과 무예전문 하급관리 층도 또한 무사로서 성장하였다. 국가권한의 위임과 이에 의한 중앙집권의 지나친 부담의 경감에 의해 중앙정계에서는 정치가 안정되고, 관직이 특정 가업을 담당하는 가계에 세습되는 현상이 진행되어 귀족의 최상위에서는 셋칸케(摂関家)가 확립되었고, 중류귀족에 고정된 계층은 중앙에서는 가업의 전문기능 에 따라 공무를 담당하는 기능관인으로서 행정 실무를, 지방에서는 수령이 되어 지방행정을 담당했다(헤이안 귀족). 이 시기는 셋칸케에 의한 셋칸 정치가 전개되었고, 특정 권문(権門)이 독점적으로 징세권을 얻는 장원(荘園)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단계적으로 증가하여 수령이 징세권을 담당하는 공령(公領)과 함께 세력이 둘로 나뉘었다.
11세기 후반부터는 태상천황(太上天皇)이 지텐노키미(治天の君)가 되어 정무를 돌보는 인세이(院政)가 시작되었다. 인세이의 시작이 중세의 시작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인세이 시기에는 장원의 일원영역적(一円領域的)인 집적과 고쿠가료(国衙領)의 징세 단위화가 진행되어, 장원공령제라고 불리는 체제로 이행하게 된다. 12세기 중반엔 귀족사회 내부의 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려고 하게 되어, 이에 동원된 무사의 지위가 급속히 상승하였다. 이러는 중에 최초의 무가정권(武家政権)인 다이라씨 정권이 등장하지만, 이 시기의 사회적 모순을 혼자 도맡았기 때문에 얼마 안가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 확대된 내란에 의해 붕괴되고 만다. 다이라씨 정권의 붕괴와 함께 중앙정부인 조정과는 별개로 내란을 수습하여 도호쿠의 지배권을 얻은 가마쿠라 막부가 등장하여 헤이안 시대는 막을 내렸다.
출처: 위키배과 헤이안시대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헤이한 시대는 간무 덴노가 헤이안쿄에 천도한 794년부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연 185년 혹 고토바 덴노로 부터 정이대장군을 제수받은 1192년으로 봅니다.
나라 시대가 확립된 율령제와 토지공령제가 무너진 시기, 끌어올렸던 천황 가문의 권력이 외척에 넘어갔다가 원정이 전대된 시기 입니다.
초기에는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이 어느 정도 이루어 졌으며 이 시기는 천황이 다른 나라처럼 임금 노릇을 한 일본사의 얼마 되지 않는 시기 입니다.
견당사가 중지, 대외 교류가 규슈의 다자이후에 제한되면서 국풍이라 불리는 독특한 귀족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중기에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이래로 후지와라씨가 천황의 외척으로 섭정과 관백을 독점하면서 귀족 정치로 변모, 중기 후반부터 939년 타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가 각기 동서에서 일으킨 쇼헤이, 텐쿄의 난을 시작으로 도호쿠를 중심으로 변방에서 늘 에조의 반란이 끊이질 않았고 특히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경우 스스로 신코를 자칭할 만큼 격렬했으며 이때 반란으로 700년대 정이대장군이 잠시 940년에 부활, 이때 쇼군은 후지와라노 타다부미였으며 율령제의 핵심인 왕토사상과 토지공령은 이미 헤이안 초 무너지고 있었으며 개인들의 능력차나 귀족 지방관의 탐학과 수탈, 개척지 귀속 등과 관련이 있으며 권력자들이 개척지 약탈, 국가의 수탈이 심해지며 토지 경작자들이 대귀족이나 대사원에 자신의 토지를 바치고 예속되어 버리는 현상이 증가합니다.
중앙권력은 나라 시대 말 부터 외척 가문이자 실권 가문으로 대두했던 후지와하 셋칸케가 실권을 장악해 셋칸정치를 펴며 장원을 기진받아 일본 최대의 장원 소유 귀족으로 대두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일부 천황들의 개혁 시도를 좌절시켰습니다.
천황에 협력하던 하급귀족 출신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와 같은 뛰어난 인재도 후지와라 가문에 의해 지방으로 좌천, 후지와라에 거슬리거나 후지와라의 외손이 아니던 천왕 또는 동궁이 폐립 되는 등 헤이안 시대는 후지와라 가문의 권력이 절정에 달한 시기입니다.
후기부터 섭관가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목적으로 천황이 양위하여 조고로서 원정을 펼쳤습니다.
두다 덴노 이래 170년만에 후지와라씨의 피가 섞이지 않은 고산조 젠노가 즉위하고 고산노 덴조는 장원을 대거 정리해 국가로 환수, 무너져가던 율령제도 정비를 도모하고 그 수족으로 중하류 귀족과 지방관들을 등용하는 등 정책을 펴 국정을 안정시켰는데 이는 엔큐의 선정이라 하며 이로서 장원제도의 폐단 완화, 국고 충실, 셋칸케의 경제적 기반이 약화됩니다.
고산조 덴노는 자신의 자손이 황통을 잇게 하고자 하여 양위를 실행에 옮기는 도중 요절하고 이후 황위를 계승한 아들 시라카와 덴노는 아들 호리카와 덴노, 손자 도바 덴노, 증손자 스토쿠 덴노까지 3대 42년을 상황으로 있으면서 77세 죽을때까지 권력을 휘둘렀고 시라카와와 도바 재위시 후지와라 셋칸케에서 내분이 발생, 그 씨장자가 어리거나 무능해 위세를 꺾으며 스토쿠 덴노가 어려 권력은 새로운 인이 장악합니다.
도바도 역시 할아버지 시라카와가 죽은 1129년부터 1156년까지 27년간 실권을 휘둘렀고 도바인은 자신의 장원 확대에 몰두해 기존의 개혁을 무위로 돌리고 민생 악화와 기방의 봉건화를 촉진하였습니다.
율령에 기초한 조정 정치의 왜곡과 자의적인 측근 정치, 상황의 사욕 추구는 민생의 악화와 함께 황실의 권위나 정치의 정당성도 악화시켰고 이때 조고가 일봉의 사병이었던 무사들에게 권력을 주며 무사 씨족이 성장, 그들이 상쟁한 결과 가마쿠라 막부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 시초라 하는 것이 도바 법황의 죽음 후 벌어진 도바의 아들 고시라카와 덴노, 스토쿠 조고 사이의 무력 충돌에서 천황 측이 승리한 1156년 호겐의 난 입니다.
이 후 헤이지 난 등이 겹치며 황실 권위 약화, 수도 군사 치안권이 타이라 일족에게 집중되며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필두로 하는 헤이케는 공경 외척 가문으로 승격, 수도 쿄토 인근의 무사들과 봉건적 주종관계 확립, 송나라와 교역 주선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 황실이나 후지와라 가문을 능가하는 위세를 떨치게 됩니다.
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조고를 유폐시키고 자신의 외손이었던 안토쿠 덴노를 옹립할 정도의 권세를 과시하나 키요모리 사후 동국에서 궐기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무가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를 수립하면서 헤이안 시대가 끝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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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시대 (평안 시대)
일본의 시대 구분, 그 기간은 간무 덴노가 헤이안쿄(현재의 교토)에 천도한 794년 부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연 1185년 혹은 고토바 덴노로 부터 정이대장군(쇼군)을 제수받은 1192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입니다.
나라시대에 확립된 율령제와 토지공령제가 무너진 시기이기도 하며 끌어 올렸던 천황 가문의 권력이 외척에게 넘어갔다가 원정이 전개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헤이안시대 특징 > 당시 귀족과 지방의 호족사원이 대토지 소유를 확대하여 중앙집권체제가 약해졌고, 정부의 지방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자 지방 호족들은 장원을 지키기 위해서 무사가 되어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또한 궁중 귀족문화가 찬란한 꼽을 피웠는데 9세기 말 견당사 파견이 중단되면서 중국과 외교 관계가 단절된 가운데 대륙의 문화를 일본인 기호와 감각에 맞게 소화 하려는 국풍문화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미술과 문학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으로 이루게 되었는데 가나로 쓰인 문학작품을 귀족들 사이에 유행 하였고, 일본 여류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일컫어지는 겐지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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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년 나라에서 천도한 헤이안쿄가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던 시대이다. 나라 시대에 채택된 중국식 중앙집중화 정부체계는 장원의 성장으로 변모되었다. 9세기 중엽부터 후지와라 씨가 섭정으로 왕실을 지배했다. 995~1027년에 조정을 장악한 후지와라 미치나가는 덴노가 정권을 잡자 몰락했다. 1086년 시라카와 덴노가 퇴위해 막후에서 실권을 휘두르는 인세이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권력의 중심이 바뀌었다.
이 시대에 궁중귀족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다. 밀교인 천태종과 진언종이 궁중의식과 병행해 공식적인 의식을 치렀으며 정토종도 확산되었다. 지방 군벌들 간의 무력 투쟁은 1156년 수도에도 파급되었으며 다이라 씨와 미나모토 씨가 다른 덴노를 세우기 위해 경쟁했다. 결국 다이라 씨가 승리해 1185년까지 조정을 장악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헤이안 시대는 794년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로 천도한 것으로부터, 가마쿠라 막부의 설립까지의 약 390년간을 지칭하는 일본역사의 시대구분의 하나이다. 교토에 세워진 헤이안쿄가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될까지 정치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헤이안 시대라고 한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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