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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찬밀잠자리170
대찬밀잠자리17023.06.23

이황과 이이가 일본 성리학에 영향을 줬나요?

임진왜란때 끌려간 이황과 이이 제자들이 일본 성리학 발전에 크게 영향을 줘서 일본에서도 이황과 이이가 성리학의 성인으로 대접받는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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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의 성리학은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이황과 이이의 저서가 일본에 전해지면서

    많은 연구를 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존경하게 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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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의 막부시대의 최후의 승자는 도쿠가와 이예야스였습니다. 도쿠가와 이예야스가 존경한 인물은 퇴계 이화이었고 이황의 경사상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경사상은 주일무적(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하고) 정제엄숙(마음을 정제하고 숙연한 태도를 지니고) 상성성(변하지 않는 본성을 함양함)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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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3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해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해 왔다. 그리고 도쿠가와[德川家康] 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언행록』에 의하면, 조목(趙穆)이 이덕홍(李德弘)에게 “퇴계선생에게는 성현이라 할 만한 풍모가 있다.”고 했을 때, 이덕홍은 “풍모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언행통술(言行通述)』에서 정자중(鄭子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성현의 도가 두절된 뒤에 탄생해, 스승 없이 초연히 도학을 회득(會得)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치(精緻)한 견해, 홍의(弘毅)한 마음, 고명한 학(學)은 성현의 도를 일신에 계승했고, 그 언설(言說)은 백대(百代)의 후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공적은 선성(先聖)에게 빛을 던져 선성의 학(學)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 분뿐이다.”


    이익은 『이자수어(李子粹語)』를 찬술해 이황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써서 이황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황이 제자들에게서 성현의 예우를 받는, 한국 유림에서 찬연히 빛나는 제일인자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키[山崎暗齋]는 이황을 “주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없다.”며 ‘조선의 일인(一人)’이라 평가하였다. 그리고 야마사키의 고제(高弟) 사토[佐藤直方]는 “이황의 학식이 이룬 바는 크게 월등해 원명제유(元明諸儒)의 유(類)가 아니다.”라고 찬양하였다. 이나바[稻葉默齋]는 ‘주자의 도통(道統)’에서 ‘주자 이래의 일인(一人)’이라고 존신(尊信)했으며, 구마모토학파의 시조 오쓰카[大塚退野]는 “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주자의 미의(微意)는 불명해 속학(俗學)이 되어 버렸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였다.


    도쿠가와 말기의 요코이[橫井小楠]는 이황을 원 · 명시대를 통해 ‘고금절무(古今絶無)의 진유(眞儒)’라 절찬했고, 역시 이 계통에 속하는 막부(幕府) 말 메이지[明治]시대의 구스모토[楠本碩水]는 “명대의 대유(大儒) 설경헌(薛敬軒) · 호경재(胡敬齋)와 명말청초의 육가서(陸稼書) · 장양원(張楊園)과 비교하면 훨씬 탁월하다.”고 단언하였다. 마쓰다[松田甲]의 『일선사화(日鮮史話)』에 의하면, 요코이의 친구이자 제자로서 메이지 제일의 공신이며 교육칙어(敎育勅語)의 기초자인 모토다[元田東野]는 “정주(程朱)의 학은 조선의 이퇴계(李退溪)에게 전해졌고, 타이야[退野] 선생이 그 소찬(所撰)의 『주자서절요』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으니, 내 지금 타이야의 학을 전해 이것을 금상황제(今上皇帝)에게 봉헌하였다”고 술회했다 한다.


    1926년 중국의 북경(北京) 상덕여자대학(尙德女子大學)에서는 대학의 증축 · 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해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해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였다. 이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찬시(贊詩)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라며 거리낌 없이 이황을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다음과 같은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하게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주자가 작고한 뒤 …… 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 버렸다. 퇴계는 ……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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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황은 에도시대의 유교에 큰 영향을 준 인물입니다. 이황이 제시한 경과 예가 일본의 무도 사상의 성립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성리학의 성인으로 대접받는 것은 잘 모르겠으나 일본 성리학에 있어 영향력 있는 인물로 높이 평가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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