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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의 말똥구리
땅속의 말똥구리23.05.30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사는 어디일까요?

우리나라에 지금은 많은 언론사들이 있고 이를 통해 많은 정보들이 세상에 공유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나라 언론사의 시초는 어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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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3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협성회 회보’(1898.1.1.~1898.4.2.)와 ‘매일신문’(1898.4.9.~1899.4.3.)은 배재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協成會)가 발행한 신문입니다. ‘협성회 회보’는 자주 독립 정신 고취와 비판기능 등을 갖춘 주 1회 발간 신문이었으며, ‘매일신문’은 외세 저항적인 논조를 보였고 이후 발간되는 민간신문에 영향을 준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신문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으며 우리 나라 최초의 언론단체인 ‘신문사 친목회’가 결성되어 언론의 자유와 언론의 경영문제 등을 공동으로 논의하면서 언론인의 친목도 도모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 우리역사넷 배재학당의 ≪협셩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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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모든 나라에서 언론사는 말할 필요없이 중요한 기관인데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언론사는 1883년에 창간된 '한성중앙신보’입니다. 대한제국 당시 최초의 일간신문이었고 국내 외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실었던 언론사였습니다.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등 다양한 언론사가 창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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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문은 커뮤니케이션의 한 매체인 신문지 또는 그 신문지를 매체로 사용하는 언론현상이다. 뉴스나 정보를 수집·처리·제작하여 신문지라는 특정한 대중매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정기적으로 제공하고, 그 대가로 이윤을 추구하는 동시에 공공성을 지닌 문화적인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일컫는다. 신문은 보도기능, 사회현상에 대한 해설·논평기능, 오락기능, 광고기능을 수행한다.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발간하던 조보가 있었고, 근대의 신문은 1883년의 『한성순보』에서 비롯되어 개화기,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인터넷신문으로 영역이 확장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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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사시대에 속하는 씨족공동사회와 부여·삼한 등의 부족국가인 고조선시대에는 아직 문자가 발달되기 전이기 때문에 말로만 서로 의사를 주고 받았으므로 언론은 자연히 구두적(口頭的) 형태를 띠었습니다. 즉, 마을집회소를 중심으로 마을행정이 이루어졌고 쟁의·선거나 그 밖의 중요한 사항을 회의에 부쳐 결정하였습니다.


    이 마을집회소는 씨족제가 붕괴된 뒤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원시 신라시대에는 이른바 알천(閼川) 상의 육촌회의(六村會議)라고 전해지는 것이 있어 부족연맹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 뒤 백제·고구려·신라 등 3국이 정립하여 점차로 정치·군사·경제 등의 조직이 정비, 강화됨과 더불어 중앙집권체제를 밀고 나갔습니다.


    백제와 신라는 남당과 같은 회의소가 마련되어 공적인 안건을 토의하는 언론이 펼쳐졌습니다. 특히 재상(宰相)을 선출하는 것과 같은 특별한 중대안건을 토의하기 위한 특별회의장소로서 백제에는 정사암(政事巖)이 있었고 신라에는 사령지(四靈地)가 있어, 이들 회의를 정사암회의·사령지회의라고 일컬었습니다. 고구려의 경우는 대로(對盧)와 같이 왕권을 제약하는 기능을 가진 제도가 중앙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신라의 화백회의(和白會議)는 특히 주목할 만한 특성을 가진 모임이었습니다. 남당에서 열리는 화백회의는 일종의 군신(君臣)의 합동회의이자 귀족회의·백관회의의 성격을 띤 것으로 만장일치제의 방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토의방식은 원시사회로부터 원칙적인 전통을 이루어 내려오는 것으로, 후일 고려시대 도당에서의 합좌회의(合座會議)에서도 그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라의 화백제도는 봉건 중앙집권제에서도 각계 각층의 중의(衆意)를 존중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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