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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9

황희라는 인물이 유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황희'라는 인물이 유명했었던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황희에 관한 일화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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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23.05.29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황희의 업적으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국방강화(야인과 왜 방어책), 4군6진 개척, 문물제도의 정비·진흥 등의 업적을남겼다습니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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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황희는 1363년(공민왕 12)에 태어나 1452년(문종 2)에 사망했습니다. 고려가 멸망하자 은거하다가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요청에 응하여 관료가 되었고 태종과 세종 재위기까지 관직생활을 하며 국방 강화, 예법 정비, 외교문물제도의 정비, 농업 진흥,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 진흥의 지휘감독 등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 세종 대에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8년 동안 국정을 총괄하면서 세종 대의 성세를 이룩한 인물로, 조선왕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받습니다.

    그는 청렴한 생활로도 유명 했는데 그렇게 공직 생활을 오래 했어도 자기 딸이 결혼을 해야 할 나이가 되었어도 돈이 별로 없자 세종이 ㅏ치 공주처럼 혼사비용을 대주었다는 예기가 있을 정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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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였습니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해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펴내면서, 종래 원집(元集)과 속집(續集)으로 나뉘어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내용과 현실이 괴리되는 것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한편,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였습다. 그리고 예법을 널리 바르게 잡는 데에 노력해, 원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고려의 예법을 명나라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해 개정, 보완하였습니다.


    또한, 인권에 유의해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세종대에는 의정부의 최고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영집현전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상정소도제조(領集賢殿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詳定所都提調) 등을 겸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鎭定)시키면서, 4군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였습니다. 특히,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해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內佛堂)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데 힘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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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희

    1363∼1452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호는 방촌이며, 시호는 익성(翼星)이다. 1383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 13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70여 명의 유신들과 함께 은거했으나 이성계의 간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가 성균관 학관과 세자 우정자를 겸하였다. 그 뒤 사헌 감찰, 경기도 도사를 거쳐 승추부도사·대사헌·병조 판서와 예조 판서를 거쳐 1415년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1416년에 세자 양녕 대군의 폐위에 반대하였으며, 1418년 세자가 폐위되자 태종의 미움을 사서 교하에 유배되었다. 1422년(세종 4년)에 의정부 좌참찬을 거쳐 예조 판서가 되었다. 1427년에 좌의정이 되었으나 태석균의 치죄에 관여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경기도 파주에 있는 반구정에 은거하였다. 1431년에 복직되어 1449년 관직을 물러날 때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세종 대왕을 도와 국정을 이끌었다. 농업 생산력 발전을 위해 농사의 개량과 종자 보급을 실행하고, 양잠을 장려하였다. 원나라의 잔재가 남아 있던 고려의 예법을 적절하게 개정하였고, 천민의 자식 또한 천민이 되어야 하던 법을 고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세종 때에는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 제도의 정비 등을 감독했으며 왕과 신하들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등 세종을 도와 태평 성대를 이룩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인품이 원만하고 벼슬에 있으면서도 청렴 결백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나 때로는 소신을 굽히지 않아 좌천과 파직을 거듭하였다. 조선 초기의 국가 기틀을 마련하는 데 노력하였고, 조선 왕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손꼽힌다.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방촌집>이 있다. 상주 옥동 서원에 제향되었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일화

    1)

    진눈깨비가 내린 어느 겨울날, 퇴궐한 영의정 황희가 부인에게 말했다.

    "부인, 서둘러 옷을 뜯어서 빨아주시오. 밤새 말리고 꿰매면 내일 아침 입궐할 때 입

    을 수 있을 것이오."

    영의정 황희의 겨울옷은 단벌이었다. 황희가 속옷차림으로 책을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대감마님. 속히 입궐하라는 어명이십니다."

    부인은 당황했다.

    "에그머니 대감, 큰일났습니다. 어서 입궐하셔야겠는데, 무얼 입고 들어가신단 말입니까?"

    황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하는 수 없소. 그 솜을 이리주시오."

    "솜이라니요?"

    "바지저고리를 뜯어 빨았으면 솜이라도 있지 않겠소?"

    "대감도 참 딱하십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글쎄, 솜만 꿰고 입궐하시겠단 말씀입니까?"

    "그럼 어쩌겠소? 어명이니 입궐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벌거벗은 채 관복만 걸칠 수는 없는 일이니, 어서 솜을 가져오시오."

    황희는 부인이 가져온 솜을 몸에 둘렀다.

    "부인, 실 좀 주시오. 굵은 실로......."

    부인이 바지솜과 저고리 솜을 실로 얼기설기 이어주자, 황희는 그 위에 관복을 덧입고 서둘러 입궐했다.

    영의정 이하 중신들을 불러놓고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칠 대책을 강구하라 이르던 세종의 눈에 황희의 관복 밑으로 비죽이 나온 하얀 것이 얼핏 보였다. 세종은 양털인 줄 알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 참 이상하도다. 청렴하고 검소하기로 소문난 황 정승이 양털로 옷을 해 입다니......'

    회의가 끝나고 세종은 황희를 가까이 오라고 이르셨다.

    "과인이 듣기로 경의 청렴결백이야말로 타의 귀감이 되며 하늘에게까지 상달된 것으로 아는데, 어찌 오늘은 양털옷을 입으시었소?"

    황희는 당황하여 가까스로 대답했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호나......실은 저어......이것은 양털이 아니오라 솜이니이다."

    "솜? 솜이라니? 왜 솜을 걸치고 다니시오?"

    "예, 전하, 신은 겨울옷이......단벌이니이다. 오늘은 마침 일찍 퇴궐하였사옵기에 그 옷을 뜯어서......"

    "아니, 이럴 수가...... 영상, 이리 좀더 다가오시오, 이럴 수가......"

    세종은 황희의 옷 밑으로 빠져 나온 솜을 만져 보았다.

    "영상, 일국의 영상이 청렴한 것도 분수가 있지요. 단벌옷으로 겨울을 난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소. 여봐라!"

    "예이!"

    "영상 대감에게 당장 비단 열 필을 내리도록 하라!"

    황희는 정색을 하며 아뢰었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방금 내리신 어명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지금 이 나라 백성들은 계속된 흉년으로 인하여 헐벗고 굶주리는 자가 많사옵니다. 이런 때에 어찌 영상인 신의 몸에 비단을 걸치리까? 솜옷 한 벌로 과분하오니, 이 점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오! 과연 경다운 말이오. 과인이 용포를 걸치고 있음이 부끄럽소이다."

    결국, 세종은 비단 하사하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2)

    황희정승이 젊은 시절. 그러니까 황희정승이 고려말기에 관직에 있을 때였다.

    도성에서 일을 보고 잠시 쉬기위해 도성을 빠져나와 논길을 걷는데 왠 농부가

    검은소와 누런소 두마리를 이끌며 밭을 갈고 있었다.

    그런 농부를 황희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농부가 잠시 쉬기 위해 소를 저쪽에

    두고 나무밑으로 오자 황희는 농부에게 가서 물어보았다.

    "두마리 소중에 어떤 소가 일을 잘합니까?"

    그러자 농부는 갑자기 황희를 붙자고 멀리 가더니 거기에서 황희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검은소는 꾀를 부리지만 누런소는 일을 잘하지요"

    그런 농부를 보고 황희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하찮은 소를 보고 물어보는데 어찌하여 여기까지 와서 귀에까지 대고

    속삭일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농부는 약간은 노기를 띠며 황희에게 말했다.

    "글을 배운 선비라는 자가 무슨 그런말을 하시오!

    아무리 소같이 하찮은 동물이라도 자신에게 나쁜말을 하면 싫어하는 법이오.

    그래서 이렇게 소를 피해서 여기서 귀에 대고 속삭인 것이오!"

    그 말을 듣고 황희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매우 경솔하게 행동하였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시골의 농부도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내는데 글을 배운 선비라는 자가

    이렇게 경솔하게 행동하였음을 느끼자 갑자기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농부에게 자신의 편견을 고쳐주어서 고맙다고 얘기하려 농부가 있던

    곳으로 얼굴을 돌리자 그 두마리 소와 농부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그러자 황희는 하늘이 자신의 편견을 고쳐주기위해 이런일을 벌였구나하고

    하고 생각하고 앞으로는 경솔하게 지내지 않아서 후에 영의정에까지 오를 수가

    있었다.

    3)

    황희가 정승이 되었는데도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담장도 없이 살아 마당이

    더럽다는 얘기를 들은 세종은 황희를 위해서 비밀리에 공조판서를 불러들여

    황희의 집 주변에 몰래 담장을 쌓으라고 지시하였다.

    그래서 공조판서는 건축업자 여러명을 모아 비가오는 밤 시간을 맞추어

    황희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는 서둘러 집 둘레에 담장을 쌓기 시작했는데 어찌어찌하다가 갑자기

    저쪽의 담장이 무너지면서 황희가 방문을 열어 이들의 행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래서 공조판서는 황희에게 불려갔는데 공조판서가 원래는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됬다고 말하자 황희는 비록 자신의 정승이지만 아직 백성들은 가난하게

    담장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다며 담장을 쌓으라고 했던 세종의 명을 거두어

    달라고 주청하였다.

    그러자 세종과 주변의 신하들은 황희의 청렴함을 확실히 알고 감동하며 울기도

    하였다.

    4)

    황희는 너무 청렴하게 살다보니 자신의 딸이 시집을 가는데도 혼수품을 살 돈

    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황희의 청렴함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신하들과 상의하여 황희의 딸이 시집을 갈 때 혼수품을 살 돈은 물론 그 규모도

    공주나 옹주 못지 않게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이를 본 백성들은 황희는 하늘이 내려주신 인물이라며 더욱더 존경하고 따랐다.

    5)

    김종서는 북방의 6진을 개척한 공로로 병조판서가 되어 6조에 들어와 거만함을

    떨며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영의정 황희가 정승과 판서들이 모여 회의하는 자리에 미리

    와서 있었는데 잠시 후, 김종서가 들어왔다.

    그런데 무례하게도 김종서는 영상대감이 앞에 있는데도 거드름을 피우며 삐딱하게

    앉았다.

    그러자 황희는 노기를 띠며 밖에 대고 이렇게 소리를 쳤다.

    "병조판서께서 의자의 다리 한쪽이 짧으신가 보니 와서 의자다리 한쪽을 손질해

    드려라!!!"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종서는 놀라며 자신의 무례함을 빌고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황희는 이렇게 말하며 화를 내고 나가버렸다.

    "앞으로 의자 다리가 짧거든 반드시 수리하시오!"

    그래서 이 일이 있은 후, 김종서는 그 동안 거드름을 피우던 일을 싹 고치고

    곧은 신하로 지내게 되었다.

    또 이런 말이 퍼지게 되었다.

    '사나운 호랑이와 여진족이 공격하는데도 두 눈 깜빡 안하던 호랑이 장군이

    황희의 한마디에 놀라며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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