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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6.21

고부 민란이 일어난 배경은 어떻게 되나요

1894년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나서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이야기 하였는데요. 이 엄청난 고부민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이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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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고부군 일대에는 누적된 봉건적 모순이 집중적으로 자행되어 농민의 불만이 축적,

    고조된 상황에서 전봉준의 지휘로 봉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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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부 민란은 조선 후기에 일어난 민란으로, 농민들이 군사기지인 고부에서 무기와 식량을 강제로 제공하도록 되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때 고부 군수들은 농민들의 경제적 자원을 약탈하여 그들의 경제 생활을 망가뜨렸으며, 정치적으로는 비효율적인 통치와 부패한 관료들의 행동, 부정부패가 빈번히 일어나면서 농민들의 불만은 계속해서 커져갔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부 민란은 전라도 전역에서 농민들 사이에 전쟁과 같은 충돌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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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고부 군수의 수탈로 농민의 경제생활이 파탄 지경에 달했고 후일 전봉준이 술회한 공초에 의하면 조병갑의 침학의 세목은

    민보를 축조한다는 명목 아래 백성의 노동력을 함부로 징발하였고 보를 이용하는 민간에대해 상답 1두락에 2두세를 , 하답은 1두세를 거두어 도합 700여석을 착복, 황무지를 백성들이 개간하면 문권을 주어 징세하지 않는다고 약속 후 추수할 때 수세했습니다.

    또 부유한 백성들로부터 2만냥을 강제로 빼앗고, 태인 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비각을 건조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로부터 1000여냥을 거두었으며 대동미 16두씩을 좋은 쌀로 거둬들인 후 나쁜 쌀로 바꾸어 상납, 그 이익을 착복했으며 백성들에게 불효, 불목, 음행, 잡기 등의 죄로 무고하여 재물을 빼앗았습니다.

    당시 고부군 일대는 누적된 봉건적 모순이 집중적으로 자행되어 농민의 불만이 축적, 고조된 상황에서 전봉준의 지휘로 봉기하게 됩니다.

    1월10일 새벽 마항장에 모인 농민군 1000여 명이 두갈래로 나뉘어져 고부읍의 3문을 부수고 관라오 쳐들어가자 조병갑은 달아났고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옥을 파괴해 억울한 죄인을 석방,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강화후 악질적인 이서배들을 문초했으며 불법적으로 약탈해 간 수세미를 농민들에게 반환하고, 민원의 대상이 된 만석보도 파괴합니다.

    약 1주일에 걸쳐 관아의 폐정을 처리한 뒤, 주력부대를 마항장으로 옮기고 일부는 읍에 잔류, 그 뒤 1월 25일 전군을 요새지인 백산으로 옮겼고 소식을 들은 각 처의 농민군이 전봉준의 휘하에 집결해 전면전쟁으로 전환될 기세였는데 이때 정부에서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의 실책으로 농민군을 더욱 자극, 전봉준은 사방에 격문을 띄웠으며 3월 21일 백산에서 봉기한 이후 전면 전쟁으로 돌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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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부민란은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된 농민봉기이다.

    1894년(고종 31) 1월 고부 지역의 동학접주(東學接主) 전봉준(全琫準)이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항의하고자 이 지역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켰다.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부임한 이래 ① 농민에게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여 면세(免稅)를 약속하고서도 추수시에 강제로 세금을 받고, ② 군민들에게 불효·불목(不睦)·음행(淫行)·잡기(雜技) 등의 죄명을 날조하여 2만냥 이상을 강탈하고, ③ 태인군수(泰仁郡守)를 지낸 적이 있는 그의 부친의 송덕비각(頌德碑閣)을 짓는다고 1,000냥 이상을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하였으며, ④ 대동미(大同米)를 농가에서 거둘 때는 좋은 쌀 16말[斗]을 표준하고, 상납할 때는 나쁜 쌀을 사서 바치게 하여 그 차액을 착복하였다. ⑤ 만석보(萬石洑)가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데도 임금 한푼 주지 않고 농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신보(新洑)를 쌓게 하고 가을에 가서 1두락에 1~2말의 수세(水稅)를 받아 700석이나 착복하였다.

    처음 전봉준 등은 두 차례 40∼60명이 조병갑에게 가서 만석보 수세에 대한 감면을 진정하였으나, 조병갑은 이를 일축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1894년 1월 10일 약 1,000의 동학도와 농민을 이끌고 고부 군아(郡衙)를 습격하였다. 농민군은 먼저 무기고를 부수어 총을 빼앗고, 옥을 열어 억울한 죄수들을 석방하였으며, 불법으로 약탈한 수세미를 농민에게 반환하고 만석보의 신보를 파괴하였다. 이 틈에 조병갑은 전라감영으로 달아났다가 정부에 의해 체포되고, 박원명(朴源明)이 새로 고부군수로 부임하여 사태를 잘 수습하고 농민들도 흩어져 귀가하였다.

    그러나 안핵사(按覈史)로 임명된 이용태(李容泰)는 민란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죄없는 농민들을 함부로 체포하고 부녀자들을 능욕하며 재산을 약탈하는 등 패악을 자행, 농민들을 극도로 자극하게 되었다. 이에 전봉준은 3월 21일 백산(白山)에서 동학군 8,000으로 전면전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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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항거하여 동학교도 전봉준(全琫準)의 지휘로 교도와 농민이 관아를 점령하여 만석보를 파괴하고 전라감사의 군대를 격파한 사건이다.


    당시 전라 고부 군수 조병갑은 불필요한 만석보를 다시 쌓게 하여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한 것은 물론 수세를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 자기 부친의 공덕비 건립 명목으로 약 1천 냥의 돈을 사취하는 등 온갖 횡포와 착취를 일삼았다. 이에 항거하여 전봉준 둥 농민군 지도자들은 격문이 담긴 사발통문을 돌려 봉기에 나섰다. 당시 전봉준은 1,000여 명의 농민을 이끌고 관아를 습격하여 군수를 내쫓고 아전들을 징벌하였다.

    그는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부에 대해서는 조병갑의 횡포를 시정할 것과 외국 상인의 침투를 금지하라는 등 13개조와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다. 그 결과 농민군은 정부로부터 폐정을 시정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10여 일 만에 해산하였다.


    그러나 고부민란을 조사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가 오히려 민란 관련자들을 역적죄로 몰아 혹독하게 탄압하였다. 이에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의 지도하에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기치를 내걸고 무장봉기하게 되는데, 이것이 제1차 농민봉기(1894. 4.)이다. 농민군은 점차 북상한 뒤 전주 감영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5월 초순에는 전라도 전체가 사실상 농민군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출처 : 시사상식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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