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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안경곰70
아리따운안경곰7023.08.23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의 군사들은 사병개념이었나요?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는 홍의 장군으로 불리며

왜군과의 전쟁에서 많은 승리를 올렸고

임진왜란 당시 유명한 장군중 한명인데

곽재우의 병사들의 경우는

실제로 정규군인 관군이었나요?

아니면 사병이었나요?

사병이었다면 어떻게 그 많은 병사들을

개인이 모을 수 있었던 건가요?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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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곽재우는 성리학자였고, 임진왜란이 발생한 후 정규군이 아닌 의병장으로 붉은 옷을 입었다 하여 홍의장군이라 불리었습니다.

    게릴라, 유격전을 주로 하였으며, 심리전, 기만전술을 능수능란하게 지휘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청년기에 무예에 몰두하였는데 이유는 지방 사족의 자제들은 중앙에 진출하기 위해 대과에 급제해야 하나 사실상 한양 내 집안 자제들과 경쟁하기에 부담이 커 경쟁이 낮은 무과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러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34세에 정시에 지원하여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를 하였었으나 이후 감수에서 몇 개의 답안이 문제가 되어 파방, 즉 최종 불합격 처리되었습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고, 거병하여 의병장이 되었습니다. 왜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면전으로 보기 어렵고, 실제 사료에도 왜구의 수송선, 소부대를 기습하는 방식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임진년 5월초부터 전승에 대해 알려졌는데 부장 4명과 낙동강에서 왜선 4척을 물리쳤다는 기록, 13명과 함께 같은 곳에서 올라오는 11척의 왜선을 몰아냈다는 기록 등으로 볼 때 소규모였던 것으로 확인되며, 이후 의병의 규모가 커지면서 2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곽재우는 자신의 경상남도 의령 쪽에 의병훈련지를 정하고 의병을 모은다 널리 알렸으며, 사람들이 모였고, 처음에는 수십에서 시작하여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정규군은 아니었고, 지역에서 무예를 수련하거나 힘 좀 쓰는 장사들과 뜻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였던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솔선수범하여 나서는 리더들과 그와 함께 하는 이름 모를 영웅들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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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처음에는 곽재우 자신의 노비 10여명을 모으는 데에 불과했지만, 곽재우 부대는 나중에 2천 명에 달할 정도로 커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병사들의

    가족까지 돌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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