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장군 곽재우는 어떤사람인가요?
홍의장군 곽재우는 임진왜란때 의병으로 많은 활약을 했다고 하는데, 이분은 어떤사람인지 구체적인 업적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곽재우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1552년(명종 7)에 태어나 1617년(광해군 9)에 사망했다. 34세 때 과거에 합격했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무효가 되자 평생 은거할 결심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대패하자 의병을 일으켜 뛰어난 통솔력과 전법으로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붉은 옷을 입고 의병을 지휘하며 스스로 홍의장군이라 했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거듭 고사하여 은거의 결심을 버리지 않았다. 시문에도 능하여 저서로 『망우당집』을 남겼다.
* 생애 및 활동사항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다. 그러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발표한 지 수일만에 전방(全榜)을 파해 무효가 되었다.
그 뒤,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거름강) 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 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 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 해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에, 곧 이어 형조정랑에 제수되었다.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해 조방장(助防將)을 겸했다.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 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 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했다. 그러나 그 역(役)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해 8월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했다.
그 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다.
그해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서야 부임하였고, 이듬해 봄에는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이 문제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 뒤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靈山縣) 남쪽 창암진(滄巖津)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설계를 세웠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 찰리사(察理使)가 되어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을 보수했다.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찰리사라는 벼슬마저 사퇴했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그해 10월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고, 다음달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嘉善大夫龍驤衛上護軍)로 승진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서울에 올라가 호분위(虎賁衛)의 부호군, 호분위의 대호군(大護軍) 겸 오위도총부의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에 함경도관찰사로 바꾸어 발령했다.
1612년(광해군 4)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소를 올리고 낙향했다. 1616년 창암강사에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가지 않고, 이듬해 죽었다.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鼎巖津: 솥바위 나루)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 적이 의심하도록 하기 위한 위장 병사)을 구사해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했다. 그리고 유인해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수십 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2,000인에 이르는 큰 병력을 휘하에 가질 수 있었으며, 그 병력을 바탕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해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했다. 왜군의 진로를 차단해 계획한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 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을 기습해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해 물리쳤다. 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전투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해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접근을 막았다.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묘지는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다. 죽은 뒤에 사우(祠宇)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문화체육부가 제정한 1995년 12월의 ‘문화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곽재우 [郭再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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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1552(명종 7)∼1617(광해군 9))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현풍. 자는 계유, 호는 망우당입니다. 곽재우는 경상남도 의령 지역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켰어요.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노비들을 데리고 전쟁에 참여했으며, 자신을 따르던 의병은 점점 늘어 수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곽재우는 붉은 옷을 입고 싸워 홍의 장군이라 불렸답니다.
곽재우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인 정암진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여 그 결과 전라도로 진출하는 왜군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출처 - 지식백과 곽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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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기 의병장 활동
평생 은거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으나, 1592년 5월 23일(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연이은 관군의 패배와 선조의 의주(義州)로 피난 소식이 날아오자, 6월 1일(음력 4월 22일)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붉은 옷으로 철릭을 해 입고, 이불에 "천강 홍의 장군"(天降 紅衣 將軍)이라 적어 깃발을 만들었다. 그는 2천 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 활동으로 의령·창녕(昌寧) 등지의 산악에 매복하고 있다가 신출귀몰하며 왜군을 물리치고 왜군의 호남 진격을 저지하였고, 왜 보급선을 기습하여 보급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김시민의 진주성 싸움에 원군을 보내 승리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때 붉은 비단으로 만든 군복을 입고 아군의 맨 앞에서 싸웠기 때문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였다.
1592년 5월 함안군을 함락, 점령하고 정암진(鼎巖津, 솥바위나루) 도하 작전을 전개하는 왜군과 교전,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붉은 비단으로 된 옷을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을 자처하였고, 기습과 매복이 성공을 거두어 관군도 이기지 못한 왜군을 격파하면서 유명인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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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의병 중 가장 먼저 기의했으며 여러 전투에서 홍의를 입고 지휘해 뛰어난 무공을 세웠습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이라 일컬으며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십명으로 출발한 의병은 2천여명까지 늘어 의령, 헌풍, 창녕, 영산, 진주 등 경상도 일대에서 활약했으며, 왜군의 군수물자와 병력운반 선박을 습격해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등 유격전술로 뛰어난 전과를 올리며, 1차 진주성싸움에서 진주를 지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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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의병장으로, 주로 육전에서 왜군을 교란하고 전술 등이 뛰어났던 지휘관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의병장으로서 지속적인 공적을 세우자 조정에서 관직까지 내렸던 의병장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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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 곽재우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1552년(명종 7)에 태어나 1617년(광해군 9)에 사망했다.
-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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