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80년대부터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내 식민지 개척에 대한 관심은 극대화 되었고, 한정된 아프리카 땅을 놓고 벌어지는 아프리카 쟁탈전으로 유럽 제국들 간 갈등이 고조되고 전쟁의 가능성은 높아졌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서아프리카 회의’ 혹은 ‘콩고 회의’로도 불리우는 ‘베를린 회의’는 콩고 강 어귀에 대한 특별 지배권을 주장하는 포르투갈의 제안으로 개최되었다. 독일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의 주재로 1884년 11월15일부터 1885년 2월26일까지 열렸다. 이 회의에 참석한 국가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갈, 러시아, 스페인, 스웨덴-노르웨이, 터키, 그리고 미국 등 총 14개국이었다. 14개국 중 프랑스, 독일, 영국 그리고 포르투갈은 이 회의 주요국으로 당시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의 이해 당사자였다. 이 회의는 아프리카인이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유럽 열강간의 충돌을 줄이고 아프리카 식민화에 대한 규칙을 논하는 자리가 되었다. 베를린 회의에서 포르투갈의 콩고강 유역에 대한 포르투갈의 영유권 주장이 거부되면서 벨기에 레오폴 2세(1835-1909)의 개인 식민지인 ‘콩고 자유국’이 탄생하게 됐다.
베를린 회의가 개최될 시기까지 아프리카의 80%는 그들 전통에 의해 자치적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직 아프리카 해안 지역만 유럽에 의해 식민지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 회의로 유럽 제국열강들은 아프리카 내륙 통제권을 손에 넣기 위해 다투었다. 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에 의해 결정된 문화, 언어, 종교, 정치적 경계에 대한 고려 없이 기하학적 경계선에 대해 협상을 했다.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지리학적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전통적 정치 분할에 대한 이해 없이 경계선이 그려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