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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빙23.06.20

명나라가 멸망하게된 이유는무엇인가요?

중국역사를 보면 자주 나라가 생기고 멸망하던데 명나라가 멸망하게된 원인과 명나라의 역사는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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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92년 조선에 임진왜란이 발발 이에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나 명나라는 조선을 의심했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일본의 침입에 대해 큰 신경을 쓰지 않아 요동지역 국경지역에 있는 군사 5천명을 선발대로 파병하나 일본의 기습으로 대패하고 1592년 12월 이여송 부대 4만 3천명을 다시 조선에 파병합니다.

    이여송 부대는 조선에 오기 전 영하지역에 있던 명에 귀순한 몽골인 보바이가 세력이 커지자 독립을 하기 위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오는 길이었고 그 다음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조선이었습니다.

    이여송 부대는 먼 보급로를 고려해 이때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화폐 은을 가져와 보급품과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선에서 보급받으려하나 이때 조선은 은을 받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요동, 산동지역에서 명나라산 보급품을 매입후 조선으로 배송,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보급로가 길어졌고, 전쟁 비용도 많이 소비되어 명군은 7년간 전쟁비용으로 780만냥 소비하게 됩니다.

    명나라는 서북쪽에서는 보바이 반란, 동남쪽 임진왜란, 서남쪽 양응룡의 난까지 진압으로 은 200만냥을 탕진, 당시 명 조정의 1년 예산은 400만냥입니다.

    즉, 전쟁에 소비한 은만 총 1000만냥이 넘는 비용이었습니다.

    명이 은으로 인해 명을 다해갈 무렵 청을 일으킨 만주족이 등장하고 아직 만주이전 여진으로 불리던 시절 각각의 독립부족으로 존재했으며 명의 여진관리는 협조적이고 순종적인 부족에게 교역권을 제공하는 상호견제와 충성경쟁을 통해 오랑캐를 통제했는데 당시 오랑캐를 쥐락펴락한 인물 이성량은 임진왜란 때 파병 온 명 장수 이여송의 아버지로 이성량에게 순종하며 교역권을 받은 여진족 중 하나가 청을 건국한 누르하지 가문입니다.

    신하들은 기존에 쓰던 몽골 문자를 사용하자고 반대아나 누르하치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흩어져있던 여진족을 통합, 만주 문자 창제, 결국 1616년 후금을 건립합니다.

    그 후금은 청나라로 이어지게 되며 누르하치가 결국 명을 망하게 합니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나라의 멸망 원인으로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1. 문관집단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져서 황권이 억제받게 되었다.

    2. 명나라말기의 경제제도가 시대를 앞서서 발달했다.

    3. 장거정의 세금개혁은 명나라말기의 상품경제를 지나치게 발전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명나라의 멸망을 불러왔다.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나라 말기에 홍건적의 난과 군벌들의 봉기와 수많은 한족 백련교도들의 중심 반란으로 전국이 어지러워지자 일어난 주원장은 처음엔 백련교-홍건적에 몸담았다가 두각을 나타내 지도자가 되어 오왕을 자칭하였다. 그 후 각지에서 한족 군벌들과 원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황제가 되어 명나라를 세운 뒤 대도를 함락시켰다. 원나라 원순제는 북경을 버리고 몽골 고원으로 도망쳤고 만리장성 이남은 명나라의 깃발 아래 통일 되었다. 주원장 홍무제는 남경을 수도로 하고 대규모 숙청을 일으켜 공신들을 제거하고 명나라의 기초를 닦았다.


    홍무제 재위시절 태자인 주표가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손자인 주윤문(건문제)이 황태손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홍무제는 자신의 장남인 태자 주표외에 다른 아들들은 번왕으로 임명하여 약간의 병사를 주고 마치 지방 제후처럼 역할을 주고 있었다. 홍무제가 죽자 2대 황제에 오른 손자 건문제는 신하들의 요청에 따라 삼촌인 번왕들을 숙청하려다 오히려 홍무제의 넷째 아들이자 가장 강력한 군사를 가지고 있던 연왕 주체가 일으킨 정난의 변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주체는 스스로 3대 황제에 올라 영락제로 즉위하였다. 영락제는 환관 정화를 시켜 남해안을 탐사하게 하고 몽골(타타르), 오이라트와 계속 전쟁을 벌여 북방을 억제하였으며 베트남을 점령하여 중국의 영토로 만든다. 영락제의 손자인 선덕제 시기에는 비록 베트남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선덕제의 현명한 통치로 번영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정통제가 즉위하자 환관 왕진(명나라)의 국정농단으로 국정이 혼란스러워진다. 또한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기가 찾아와 북쪽에선 오이라트의 에센 칸이 침공해오며 남쪽에선 왜구가 해안가를 약탈한다. 명은 이에 맞서 싸웠으나 오히려 에센에게 대패하여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토목의 변이 일어났다. 그래도 에센 칸이 내분으로 살해되고 명나라 군대가 몽골족을 격파하여 위기는 벗어났으며 정통제가 돌아와서 수습하게 된다. 이후 성화제와 홍치제가 선정을 펼치면서 평화와 안정을 찾아 번영한다. 다만 이 시기부터는 더이상 주변국에 패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무능한 황제들이 즉위하면서 명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특히 북로남왜의 위기가 다시 찾아왔는데 계속된 다얀 칸과 알탄 칸을 비롯한 북방 유목 민족의 침입에 시달렸으며, 수도까지 위협받는 사태가 벌어진다. 남쪽에선 왜구가 해안가를 자주 침입하여 약탈을 하고 지방을 초토화하는 위기가 찾아왔다.(북로남왜) 게다가 명나라 황제들의 무능과 누적된 정치-경제 위기는 사회적 불안을 가져왔다.


    1572년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황제 만력제가 즉위하였는데 초창기 신하 장거정에게 정치를 맡겼을 때는 장거정이 비전있는 정책으로 국가를 안정시켰으나, 장거정이 죽고난 후부터는 만력제가 정치에 흥미를 잃었고 국정을 내팽개치면서 무능한 정책을 남발하였다. 거기다 만력 3대정으로 재정은 파탄나고 무거운 세금에 시달린 농민들의 불만은 커졌고 농민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 이후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동림당과 반 동림당과의 갈등과 위충현을 비롯한 환관 세력의 정치 농단으로 명나라의 정치 혼란은 심해졌다. 한마디로 명 4대 암군 시기부터 명나라의 국운은 결정적으로 기울어진것을 넘어서 멸망에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숭정제가 즉위하여 위충현을 제거하였지만 명은 이미 누적된 정치 혼란과 경제 혼란으로 막장이 된 터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변방의 만주에서 여진족이 만주족을 자칭하여 후금을 세우고 굴기하여 명을 위협하게 된다. 명은 이를 조선과 연합해 제압하려했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요동과 여진족에 대한 패권을 최종적으로 상실하였다. 후금은 이후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과 국교를 수립하고 몽골 부족들을 점진적으로 복속하였다. 이후 청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에 즉위하여 명나라와의 대결 노선을 확실히 했다.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완전히 복속시킨 청나라가 송산 전투에서 명나라에 대승을 거두자 명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이 위태로워졌다.


    이때 이자성, 장헌충 등이 일으킨 이자성의 난과 같은 농민 반란이 전국을 휩쓸고 농민군이 수도 북경으로 몰려오는 사태가 발생한다. 정예군이 청나라와의 결전에서 전멸한 상태에서 변경 수비대만으로 북방을 막고 있던 명나라는 농민의 대병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그나마 남아있던 지방군마저 모두 반란군에게 패배하면서 더는 반란군을 막을수 없었다. 결국 북경이 이자성군에 함락되자, 숭정제는 자결하면서 명나라는 사실상 무너졌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를 막기 위해 오삼계 등이 지휘하던 명나라 군대가 적이었던 청나라에 투항하자 산해관에 입관한 청나라 군대는 이자성군을 순식간에 격파하고 베이징을 점거한다.


    입관 이후 명청교체기 동안 이어진 중국 대륙 정복 전쟁에서 이자성-장헌충 반란 세력과 남명 정권은 연달아 패배하고 청나라는 천하를 통일하였다. 남명의 영력제가 살해당하면서 주씨의 후손은 끊겼고, 청나라에 투항했던 옛 명나라 장군 출신 번왕이 숙청당하는 과정에서 삼번의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마지막으로 타이완 섬의 동녕 왕국(명정시기)도 펑후해전(澎湖海戰)에서 청나라한테 대패하여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명나라의 잔존 세력은 그렇게 청에게 굴복해 완전히 멸망했다. 그러나 남아있던 명나라 유민 가운데 일부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구호 아래 청나라 시대 내내 비밀결사의 형태로 남기도 했다.


  •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첫째, 명나라는 "당쟁(黨爭)"때문에 망했다. 어느 왕조이건 당쟁이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당쟁을 조장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조정의 평형과 안정을 얻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당쟁은 천하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통치를 공고히 해주는 역할을 했다.


    둘째, 청나라는 "창위(廠衛)"때문에 망했다. 동창(東廠)과 금의위(錦衣衛)는 황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탄생했다. 동창과 금의위는 영화드라마에서 묘사한 것처럼 그렇게 과장되지는 않았다. 창위는 그저 불법관리를 감독하고, 백성들은 전혀 해치지 않았다. 그래서 명나라가 창위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은 웃기는 말이다.


    셋째, 명나라는 "환관전정(宦官專政)"때문에 망했다. 명나라때 환관이 권력을 독점했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만력제 중기이후, 환관의 지위는 쇠락한다. 어떤 사람은 위충현(魏忠賢)을 얘기한다. 위충현은 확실히 발호했다. 그러나 천계제가 위충현을 기용한 것은 바로 동림당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위충현이 아무리 발호해도, 건곤은 천계제가 장악하고 있었다.



  • 명나라멸망 원인은 이자성의 난 때문에 멸망했습니다.

    중국 왕조들은 대부분 농민 봉기로 인해 멸망한게 많죠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