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친일파인 윤덕영이라는 인물은 어떠한 인물인가요?
얼마전 이완용보다 더한 최악의 친일파는 윤덕영이라고 들었습니다.
도대체 어느정도의 영향력을 미쳤기에 이러한 최악의 친일파로 불리는지 윤덕영이라는 인물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제강점기의 가장 악질적인 친일파 가운데 하나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숙부이기도 했던 윤덕영입니다.
그는 장충단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자고 주도하고, 경술국치 이후 고종을 협박해 일왕에게 순종을 보내게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아 호의호식하고, 노년에 이르도록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고 지지하는 온갖 활동을 벌이다가 1940년에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고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문신, 본관은 해평, 영돈령부사 철구의 아들이자 택영의 형 , 순정효 황후의 삼촌 입니다.
1894년 진사로 문과에 급제, 이듬해 비서감 우비서랑이 되고 총리 대신 비서관 겸 참서관, 시독관, 비서승, 농상공부 참서관, 내부지방국장 등을 역임, 1901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습니다.
이어 궁내부 특진관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로 전임했다가 이듬해 철도원 부총재가 되어 경부선의 철도부설에 공을 세운 후 지예아문 부총재, 봉상사제조, 비서원경, 의정부참찬, 홍문관학사 겸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찬성을 지냈으며 1908년 시종원경이 되고 1910년 국권 침탈 때 순종에게 강요하여 병자 수호 조약에 옥새를 찍게 했으며 일본 정부에 의해 자작이 되고 이왕직 찬시를 지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6년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다. 1907년 4월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日講官)에 임명되었고, 5월 태의원경 겸 황후궁대부(皇后宮大夫)를 겸임했다. 10월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서보장을 받았고, 11월 임시황실어진용급위호사무정리위원장(臨時皇室御進用及衛護事務整理所委員長)으로 선임되었다. 황후궁대부로 재임하면서 1908년 6월 시종원경과 10월 국조보감 교정관을 겸임했다. 같은 해 2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조직된 대동학회 회원으로 참여했고, 8월 기호흥학회에서 찬무부 찬무원 및 특별찬성회원, 10월에는 일본적십자사 특별사원으로 위촉되었다. 그해 권상사(勸商社)를 발기해서 조직했으며 한성부민회 산하단체인 한성북부 관진방회(觀鎭坊會) 부회장에 선임되어 10월에 100환을 기부했고, 내부 한성위생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1월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으로 위촉되었다.
1909년 1월과 2월 순종이 남쪽지방(대구, 부산, 마산)과 서쪽지방(의주, 평양, 정주, 황주, 개성)을 순행할 때 호종(扈從)했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고종의 조문사(弔問使)로 다롄[大連]에 파견되었고,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관민추도회를 발의하여 장충단에서 궁내부 대표로 치전(致奠)하고 추도제문을 낭독했다. 이어 12월에는 일본적십자사 한국지부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미 사망 50일 추도회에 참석했으며, 대동교회(大同敎會) 찬교원으로 선임되었다. 1910년 8월 시종원경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하는 어전회의에 참석해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협박 · 회유에 동의하여 조인을 가장 적극적으로 가결시킴으로서 ‘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국권피탈에 앞장선 대가로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천황 메이지[明治]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행사에 초대받아 천황이 주는 주병(酒甁)을 받았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5만원을 받았고, 2월 이왕직 찬시(賛待)에 임명되어 1919년 10월까지 재임했다. 같은 달인 2월에 조양구락부 유지회를 발기해 조직했고, 3월에는 사립 오성학교(五星學校)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農談會)에서 찬성원으로 활동했다. 1912년 1월 이문회(以文會)를 창립할 때 참여했으며,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3년 7월 귀족들의 식림사업을 위해 조직된 조선임업조합 보식원 창립총회에 참석해 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15년 7월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 5주년을 선전하기 위한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특별회원으로 250원을 기부했고, 9월 가정박람회(家庭博覽會) 명예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주는 유공상을 받았고, 11월 다이쇼[大正] 천황 즉위대례식에 조선귀족 대표로 참석해서 처 김복수와 함께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7년 6월 순종이 ‘일본천황부부 알현’을 위해 일본으로 갈 때 배종했다. 같은 해 10월 친일불교단체 불교옹호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1918년 8월 경성구제회에 500원을 기부했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자 고종국장 장의괘(葬儀掛)와 제관부장(祭官部長)으로 임명되었다. 2월 「왕세자전하의 어혼의(御婚儀)는 일선일가(日鮮一家)의 화기(和氣)」(『반도시론』1919.2.)라는 글을 통해 왕세자 이은(李垠)과 일본 황실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의 결혼이 일선융화의 상징이라고 주장했다. 6월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 발기인, 10월 이토 히로부미 십년제[伊藤博文十年祭] 발기인, 12월 경성삼종현물매매시장(京城三種現物賣買市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0년 2월 조선식산은행 감사에 선출되어 1930년 10월까지 재임했다. 1920년 4월 금배(金杯)를 받았고, 6월 해동은행 설립에 참가해 1대 취체역 사장과 1923년 3대 사장에 취임했다. 1921년 일선신탁㈜ 발기인, 1922년 9월 조선협회 고문으로 활동했다. 1924년 2월 훈1등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받았고, 6월에는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 회원으로 참여해 그해 10월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5년 7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940년 8월까지 연임하며 매년 3,000원씩 수당을 받았다.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국장 주감제거(主監提擧) 및 고문에 임명되었고, 11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창립총회에 참석해 취체역에 선임되었다.
1928년 8월 식민통치 20주년을 기념해서 개최하는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를 발기해서 평의원으로 선임되었고 300원을 기부했다. 같은 해 9월 조선식산조성재단 평의원에 위촉되었고, 11월에는 처 김복수와 함께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5월 조선저축은행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9월에는 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해 설립한 창복회(昌福會)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본부 찬조원, 1931년 11월 단군신전봉찬회(檀君神殿奉讚會) 고문, 1932년 5월 조선방송협회 고문, 7월 만주국 건국기념으로 개최한 신흥 만몽박람회 고문, 1934년 4월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고문, 1935년 5월 세계홍만자회조선주회(世界紅卍字會朝鮮主會) 주석회장에 추대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제가 식민통치 25주년을 기념한 시정25주년기념표창과 은배를 받았다. 1937년 3월 조선신궁에서 열린 기년제(祈年祭)에 참석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한 직후인 1937년 8월 조선총독부 시국간담회에 참석했다. 9월 친일시국단체 동요회(同耀會)에서 육해군 국방비 1만원을 헌납할 때 500원을 기부하였으며, 조선신궁에서 열린 국위선양 무운장구(武運長久) 기원제에서 조선귀족 대표로 행사단장을 맡았다. 12월부터 1938년 1월까지 북중국 전선에 있는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북지황군위문단(北支皇軍慰問團)을 조직해서 중추원과 조선귀족 대표로 텐진, 베이징을 방문했다. 1938년 2월에는 지원병제도 실시를 환영하는 「국민된 책임의 중대함을 통감」(『매일신보』1938.2.23.)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4월 조선신궁에서 열리는 지원병제도 실시 봉고제(奉告祭)에 참석했고, 5월 경학원 대제학 겸 명륜학원 총재와 조선실업구락부 고문에 선임되었다. 같은 달 조선신궁에서 열린 쉬저우함락 축하 봉고제에 참석했으며, 6월 육군지원병훈련소 개소식에 수차례 참여했다.
1938년 6월 조선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8월 시국대책조사회 위원에 위촉되었고, 10월 추계 석전 경학원 명륜당 강연에서 ‘시국의 인식과 유림의 각성’이라는 주제로 중일전쟁을 찬양했다. 1939년 2월 경성부 육군병지원자후원회 고문, 3월 육군서도(陸軍書道)전람회 고문, 4월 동양의약협회 총재에 위촉되었다. 같은 달인 4월 금을 정부에 팔자는 운동에 호응해 1,000원에 상당하는 금품을 헌납했으며, 7월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 상담역, 10월 조선유도(儒道)연합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39년 11월 흑룡회가 주최한 ‘일한합병’ 30주년을 맞이해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 등을 추모하는 추도식에 참석했다.
1939년 12월 박영효 사망으로 공석이 된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된 후 전시 총동원시책에 부응하겠다는 「직책을 다할 각오」(『매일신보』1939.12.19.)라는 소감을 발표했다. 1940년 1월 조선귀족대표로 조선신궁에서 열린 기원 2600년 맞이 세단제(歲旦祭)에 참석했고, 경성일보사에서 주최하는 기원 2600년 및 시정 30주년 기념 조선대박람회 고문으로 추대되어 9월 개회식에서 ‘천황폐하 만세’ 봉창을 맡았다.
1940년 8월 중추원에서 조선인으로 최고 지위인 부의장에 올랐으며, 9월 조선총독부 교육심의위원회 위원, 10월 왕공족(王公族)심의회 심의관으로 위촉되었다. 대지주로서 1929년 충청남도에 토지 100정보 이상과 1937년 6월 경기도 파주와 안성에 논밭 30정보 이상을 소유했으며, 1933년 2월 기준으로 재산 100만원 이상을 가진 대부호였다.
윤덕영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6 · 7 · 8 · 9 · 11 · 17 · 18 · 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85∼20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윤덕영은 이완용 등 친일파 세력과 합세해 순종을 협박했고,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숨기자 억지로 빼앗아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는데 일조했다고 합니다. 결국 윤덕영은 일제에 공을 인정받아 자작 작위를 받았는데 물론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윤덕영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때에는 윤택영, 민병석과 함께 대궐 안의 반대를 무마하면서 고종과 순종을 협박하고 국새를 빼앗는 따위의 방법으로 늑약 체결에 가담하여 일본제국으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습니다. 훈1등 자작으로 합방 은사금 5만 엔을 받았으며, 이왕직찬시(李王職贊侍)가 되었고 곧 장시사장(掌侍司長)이 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 일주일 전에 창덕궁에서 열린 마지막 어전 회의에 윤덕영과 민병석은 고종을 모시고 참석했으며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중 옥새가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 친일파가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병풍 뒤에서 숨어서 몰래 듣고 있던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들고 울면서 도망치다가 앉아서 치마 속에 숨기는 등 온몸을 던져 항의했고 그 누구도 황후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자 큰아버지 윤덕영이 나서서 뺐었다. 이로써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고종과 순종을 협박해 왕실을 움직여 조선의 식민지화에 일조한 윤덕영은 그 대가로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그 때 받은 것 중 하나가 벽수산장이다. 군신간의 예의나 종친간의 의리를 도외시한채 고종의 결의를 촉구하고 어전 회의를 형식적으로 개최하는 등 한일 합방의 배후에서 활약한 윤덕영의 공로는 매우 컸는데 윤덕영 또한 한일 합방 과정에서 자신이 막후의 제1인자였다는 긍지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합방 이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이완용에게는 작위와 훈장이 거의 최고 수준으로 주어진 것에 비한다면 윤덕영에게 주어진 작위는 보잘 것 없었다. 이는 합방 과정이 표면상 이완용에 의해서 진행된 것으로 나타났고 윤덕영의 공로는 이완용의 그늘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1917년 이완용이 고종에게 도쿄로 가서 다이쇼 덴노에게 "(한일합방) 고맙다고 직접 말해라"라고 하자 고종이 "난 그짓 절대 못 한다!"라고 반항하자 보다 못한 윤덕영이 이왕가의 재산들에 직접 빨간딱지를 붙이고 궁인들에게 "이거 때면 가만 안 둔다"라고 엄포를 놨다. 그래도 고종이 거부하자 이젠 고종의 과거 여성편력을 폭로하겠다 협박했지만 나는 못한다며 계속 거부. 대신 고종이 결국 순종을 도쿄로 보내겠다고 사실상의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서 윤치호가 말하길. "저자의 친일은 영어로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고 평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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