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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빙
비비빙23.02.20

홍건적의 난은 왜 일어났나요?

대표적인 홍건적의 난은 언제 어디서 처음 일어났는지 어느왕때 일어난건지 이유가 궁금합니다 홍건적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자세히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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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7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2.2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홍건적은 원나라 농민 반란군의 이름을 말합니다.

    원 말기에 한산동을 수장으로 뭉친 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한족의 농민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홍건적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홍건적의 난은 1351년 원나라 및 고려말때 일어났습니다

    홍건적의 난이 일어난이유는 원나라의 사회계급은 몽고인, 색목인(色目人), 한인(漢仁), 남인(南人)으로 분류되었고 몽고인이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색목인은 몽고족을 보좌하는 차관급을 담당하였고 한인과 남인은 천대를 받았습니다. 유목에 익숙한 몽고인은 정치에 능하지 못했고 생활은 세련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원나라 황제는 라마교를 숭배하였는데 라마교 승려들은 많은 제물을 요구하여 백성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죠. 라마교 승려들은 모든 백성들에게 추앙받는 존재여야 했고 승려를 멸시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또한 몽고 귀족들의 전횡이 점점 심각하여 조세와 부역등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해져만 갔습니다. 이런 배경으로 한족들의 불만이 커져 저항의 무리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발생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중국 원나라 말기에 백련교도(중국의 종교)와 홍건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난입니다.

    홍건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노란색 손수건 같은 걸 머리에 두루고 싸웠기 때문이에요

    1368년레 홍건적의 출신인 주원장이 원나라를 물리치고 명나라를 세웠고 훗날 ‘홍’무제가 됩니다.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351년 원나라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한족의 농민 반란입니다. 홍건적이란 말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다고 붙은 이름으로 홍두적 또는 홍적이라고도 합니다. 이 반란은 원나라를 쓰러뜨리고 한족 왕조인 명나라를 성립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태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홍건적의 난은 7세기 중국의 대만동(大晩動)이 일으킨 사회적, 경제적 불안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중국은 대만동 이후 국가 재정의 어려움으로 인플레이션과 세금 부담이 증가하면서, 대규모의 농민 폭동과 인구 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홍건적은 후백제 나라를 건국하고 지배하면서 중국에 대적하는 선조들을 대표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많은 농민과 노비들을 끌어모아 큰 군대를 이끌어 중국 지역으로 침공하였습니다. 그 결과 홍건적의 군대는 중국에서 큰 승리를 거둬 많은 영토와 보물을 약탈하였으나, 결국은 대규모의 전쟁으로 인해 그 군대는 붕괴하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나라의 사회계급은 몽고인, 색목인, 한인, 남인 으로 분류되었고 몽고인이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색목인은 몽고족을 보좌하는 차관급을 담당하였고, 한인과 남인은 천대를 받았습니다.

    유목에 익숙한 몽고인은 정치에 능하지 못했고 생활은 세련되지 못했고 더구나 원나라 황제는 라마교를 숭배하였는데 라마교 승려들은 많은 재물을 요구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됩니다.

    라마교 승려들은 모든 백성들에게 추앙받는 존재어햐 했고 승려를 멸시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또, 몽고 귀족들의 전횡이 점점 심각하여 조세와 부역등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해졌고 이러한 배경으로 한족들의 불만이 커져 저항의 무리가 생겨납니다.

    홍건적의 중심세력은 백련교와 미륵교 신자들로 붉은 천조각으로 머리를 싸매러 동지의 표시로 삼아 홍건적이라고 하였고 원나라 조정의 압제하에 허베이성에 본거를 둔 비밀종교결사 백련교회의 두령 한산동은 일찍부터 미륵불하생의 설을 가지고 포교활동을 하여 허베이, 허난, 안후이 등 각지에서 널리 신도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1351년 대범람을 일으킨 황허강 수리를 위하여 많은 농민과 노동자를 징발하였는데, 그로 인해 생긴 민심의 동요를 틈타 송나라 휘종8세의 손자라고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홍건적은 최초의 탄압으로 교주 한산동이 전사하였으나, 교도유복통 등은 그의 아들 임아를 받들고 안후이성을 빠져나와 그를 제위에 올려 송국을 세우고 원나라 타도의 격문을 사방에 띄웠습니다.

    이를 계기로 후베이의 서수휘, 안후이의 곽자흥, 주원장 등을 비롯해 허난 지방의 농민들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홍건적은 14세기 중반 즉 원나라 말기에 강남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 군입니다 이들 중 한갈래는 북중국과 요동 일대를 거쳐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침입 하였지요 당시 홍건적은 고려를 원의 동맹자 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따라서 고려를 공격함으로써 그 배후에 요동을 안정화시키는 전략을 취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원인은 홍건적이 고려를 피난처로 생각했다는 점이지요 실제로 요동의 군사적 대치가 긴박하게 전개된 상황에서 홍건적들에게는 고려는 좋은 안식처로 생각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려군은 곧바로 반격에 돌입하여 1360년 1월에는 양군이 각각 수천명씩의 전사자를 내는 치열한 공방 끝에 고려군은 빼앗긴지 20일 만에 서경을 수복하는 전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상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홍건적의 난은 원 말기에 한산동을 수장으로 뭉친 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한족의 농민 반란국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홍건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산동은 스스로 자기가 미륵불이라 자칭하여 민심을 선동하였다. 한산동은 관군에게 붙잡혔으나 그의 부하와 아들 한림아가 국호를 송이라고 붙이고 황제로 등극하였다. 후에 원나라와 치열한 전투 끝에 요동으로 밀렸나게 되고, 후에 고려 영토로 들어오게 된다.

    한족의 왕조를 복원시키기 위하여 주원장이 남경을 근거지로 반란에 성공하여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구하고 연호를 홍무라 정하니 홍무제가 되었다. 원은 북경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로 통일이 되고, 결국 주원을 점령하여 한족 왕조를 복원시켰다.

    역사적으로 홍건적의 난은 명나라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