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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때까치29
굳센때까치2923.05.30

집현전 학자들은 어떤일을 한건가요?

훈민정음은 오롯이 세종대왕님께서 만든 글자라고 하던데요. 우리가 알고 있던 집현전 학자들도 참여했다는 얘기는 잘못됐다고 하던데, 그럼 집현전 학자들은 도대체 어떤일을 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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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3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은 좋은 정치를 펼치려면 무엇보다 뛰어난 인재를 기르고 학문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도서관인 집현전을 학문 연구 기관으로 만들고 학자 20여 명을 뽑아 일하게 했다.

    집현전에서 일하는 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왕과 신하의 학술 토론인 경연과 왕세자에 대한 교육인 서연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전문 지식을 가진 학자들이 왕과 왕세자가 바른 정치를 펼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현전 학자들은 외교 문서를 작성하거나 과거 시험의 시험관이 되거나, 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위해 많은 책을 내려 주었고, 관청의 일에서 벗어나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 결과, 집현전은 학문 연구를 바탕으로 훈민정음 창제를 돕고 《고려사》와 《농사직설》, 《팔도지리지》, 《삼강행실도》,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 많은 책을 펴냈다.

    그러나 세조 때인 1456년 집현전에서 일하던 여러 명의 학자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죽임을 당하면서 집현전도 폐지되었다. 이후 집현전의 역할은 홍문관이 대신하다가 정조 때 규장각으로 이어졌다.

    세종은 집현전의 학사들을 위해 사가독서 제도도 만들었다. 사가독서란 집현전에서 일하는 젊은 학사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였다. 이것은 세종이 학문 발전에 기울인 관심과 정성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제9대 임금인 성종도 사가독서를 장려하여 학사들이 머물며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인 독서당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사가독서는 제10대 임금인 연산군 때 폐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집현전 - 조선 세종 때 만든 학문 연구 기관 (한국사 사전 1 - 유물과 유적·법과 제도, 2015. 2. 10., 김한종, 이성호, 문여경, 송인영, 이희근, 최혜경, 박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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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집현전은 학문 연구 기관으로서 제도적으로는 도서의 수장(收藏: 수집과 보관)과 이용의 기능, 학문 활동의 기능, 국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기능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현전의 기능과 성격은 37년이라는 짧은 존속 기간에도 불구하고 단계적인 변화를 보입니다.

    제1기[1420년(세종 2)∼1427년(세종 9)]는 활발한 활동은 없었으나, 전시기를 이끌어나갈 대부분의 기능이 마련되었고, 학문적 수련을 쌓아 자기 충실을 기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집현전은 경연관(經筵官) · 서연관(書筵官) · 종학교관(宗學敎官) · 강서원관(講書院官)으로 시강과 왕실 교육 담당, 사대문서(事大文書)의 작성, 가성균관직(假成均館職 : 성균관의 임시 관직)으로서 명나라 사신의 접대, 사관(史官)으로서 사필(史筆 : 역사를 기록) 담당, 시관(試官)으로서 예조와 더불어 과거 주관, 지제교(知製敎)로서 사명(辭命, 敎命 : 왕이 내린 명령)의 제찬(制撰), 국왕의 사자(使者)로서 치제(致祭 : 제례를 행함) · 사장 환급(辭狀還給 : 각종 공문의 전달과 접수) · 사신 문안(使臣問安) · 반교(頒敎 : 왕의 교시의 반포), 풍수학관(風水學官)으로서 풍수학 연구 등의 직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제2기[1428년(세종 10)∼1436년(세종 18)]는 집현전의 정원이 16인에서 32인까지 증가되었습니다. 기능 또한 확대되어 유교주의적 의례 · 제도 · 문화의 정리 사업이라 할 수 있는 고제 연구(古制硏究)와 편찬 사업을 시작해 가장 활기찬 시기였습니다.

    편찬 사업은 집현전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으로 조선 초기 문화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편찬 사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정치에 귀감이 되고 후세에 영감(永鑑)하기 위한 우리 나라와 중국의 각종 사서의 편찬과 주해 사업이었습니다.

    특히 훈민정음의 창제와 이에 관련된 편찬 사업인 『운회언역(韻會諺譯)』 · 『용비어천가주해(龍飛御天歌註解)』 ·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 『동국정운(東國正韻)』 · 『사서언해(四書諺解)』 등은 우리 나라의 문화 유산으로서 귀중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집현전의 이 같은 고제 연구와 편찬 사업은 세종대의 황금시대를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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