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화가 김득신에 대해 알려주세요~
조선 후기 화가 김득신은 어떤 작품들을 주로 그렸나요?
그리고 김득신의 작품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요?
그의 작품이 조선 후기 미술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득신은 도화서 화원 출신으로 초도 첨절제사(椒島 僉節制使)에 이르렀습니다. 자연과 풍속화를 잘 그렸으며 심사정, 정선과 함께 영조 때의 삼재(三齋)로 불렸습니다. 현재 김득신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회화는 백 여 점에 달하며, 이 중 풍속화가 가장 많습니다. 그는 김홍도(金弘道), 신윤복(申潤福)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풍속화가’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인 〈야묘도추(野猫盜雛)〉는 화창한 봄날에 고양이가 병아리 한 마리를 훔쳐 달아나버리자 어미닭과 주인 부부가 놀라 쫓아가는 모습을 해학적이고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풍속화 외에도 산수화, 화조영모도(花鳥翎毛圖,)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등의 다양한 회화를 남겼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의 화풍을 보면 초기 김응환을 통해 집안의 화풍을 계승했고, 이후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도석인물, 산수, 영모 등에서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으나 풍속화의 경우 더욱 두드러진 양상을 보이며, 김홍도의 후기 풍속화풍을 계승, 동시에 산수를 배경으로 삽입한 점이 특징이며, 해학적인 분위기와 정서를 더욱 가미해 풍속화에서 김홍도 못지않은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김득신은 김홍도의 풍속화풍을 계승해 배경묘사와 세부표현을 발전시켰으며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고 해학적 분위기를 가미했습니다.
김홍도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계씅해 19세기 화원화풀으로 자리잡는데 기여, 현실감 있는 배경과 상황묘사, 능숙한 담채 사용에 뛰어난 면모를 보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은 영·정·순조대의 도화서 화원이자 규장각 초대 자비대령화원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원가문인 개성김씨 출신으로 44년 이상을 화원으로 봉직하며 주요한 화사의 중책을 맡은 전형적인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의 면모를 보여준 화가이다. 또한 그는 잘 알려진 풍속 외에도 산수, 인물, 영모, 화조 등 거의 모든 장르에서 뛰어난 실력을 뽐내던 당대 최고의 화가 중에 한 명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홍도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은 화가라든지, 풍속으로만 유명한 화가라든지 그를 한정해서 보는 시각들이 많았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이 논문은 김득신의 생애를 재구성하여 한국회화사에 끼친 그의 영향력을 재평가해보고자 하였다. 김득신의 양가는 조선 후기 명문 화원집안인 개성김씨와 신평한씨로, 그는 일찍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고 십대에 도화서 화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1772년(영조48) 『육상궁시호도감의궤』를 비롯하여 19개의 의궤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하여 그의 공적 활동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규장각 자비대령화원 직제가 생긴 후, 그는 초대 자비대령화원으로 선발되어 37년간 규장각 내부 활동에 정진하였는데, 용주사 불화 조성의 감동(監董), 정조어진 도사, 《화성원행도병》 제작 등 주요한 화업뿐만 아니라 어제 인찰, 도서 편찬 등 일상적인 업무에도 충실하였다. 이같은 탁월한 기량과 성실한 태도로 정·순조 시기 기복 없이 신임을 받았는데, 10차례의 포폄등제(褒貶等第) 기록, 녹취재에서 19회에 걸쳐 정6품 사과(司果)와 정7품 사정(司正)에 부록된 성적, 두 차례의 도화서 별체아 부록 등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공적수행 뿐만 아니라 사적인 작품 활동도 꾸준히 전개해나갔다. 그는 김응환을 비롯한 가문 인맥과 김홍도, 이인문 등 선배 화원들과의 친분을 통해 조선 화단의 중요한 인맥들과 교류의 폭을 넓혀나갔다. 이같은 인맥을 통해 그는 사적인 주문을 받아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제작하였는데, 《고산구곡시화병》, 《한강주유아회첩》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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