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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때까치29
굳센때까치2923.06.01

조선시대 후기 화가 김득신에 대해 궁금해요.

김홍도, 신윤복과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라 알려진 김득신은 상대적으로 낯설게 느껴지는데요. 김득신의 작품은 어떤 것이 있고, 어떤 특징을 가진 화가인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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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현보(賢輔), 호는 긍재(兢齋), 초호는 홍월헌(弘月軒). 김응리(金應履)의 아들이며, 화원이었던 김응환(金應煥)의 조카이다. 화원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한중흥(韓重興)의 외손자이다.

    개성 김씨 가문은 김응환때부터 도화서 화원을 지속적으로 배출하는 명문 화원 가문을 이루었다. 따라서 김득신 집안의 구성원은 화원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김득신은 화사군관으로 초도첨사(椒島僉使)를 지냈고 동생인 김석신(金碩臣), 김양신(金良臣), 그리고 아들인 김건종(金建鍾), 김수종(金秀鍾), 김하종(金夏鍾)이 모두 화원이었다.

    김득신은 활약상에 비해 기록이 적으며 생애도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근역서화징』에는 김득신의 생년이 1754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부친 김응리의 생년과 11년, 김응환과는 12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어서 그의 생몰년에는 의문이 남는다.

    활동사항

    김득신은 흔히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화가로만 이야기되어 왔으나 그의 회화적 기량은 조선 후기 도화서를 대표하는 화가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그의 화풍을 보면 초기에는 김응환을 통해 집안의 화풍을 계승하였고, 이후에는 김홍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도석인물(道釋人物), 산수, 영모(翎毛) 등에서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으나 풍속화의 경우 더욱 두드러진 영향을 보인다. 그는 김홍도의 후기 풍속화풍을 계승하는 동시에 산수를 배경으로 삽입한 점이 특징이다. 여기에 해학적 분위기와 정서를 더욱 가미하여 풍속화에서 김홍도 못지않은 역량을 발휘하였다.

    김득신은 1772년『육상궁시호도감의궤(毓祥宮諡號都監儀軌)』부터 의궤에 이름이 나타난다. 이때 나이는 18세로서 이후 꾸준히 의궤에 이름이 기록되고 있다. 1791년 정조어진의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리는 데에 이명기(李命基), 김홍도(金弘道), 신한평(申漢坪)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또한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같은 공필(工筆)의 고사도(故事圖)를 남기고 있어 다양한 화풍을 구사한 화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작으로는 「파적도(破寂圖)」(간송미술관 소장), 「긍재풍속화첩」(간송미술관 소장), 「귀시도(歸市圖)」(개인 소장), 「오동폐월도(梧桐吠月圖)」(개인 소장), 「풍속팔곡병(風俗八曲屛)」(삼성미술관 리움), 「신선도」(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등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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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작품으로는 파적도, 풍속화첩, 뒤시도, 풍속팔곡병, 오동폐월도 등이있습니다.

    그는 김홍도의 후기 풍속화풍을 계승하는 동시에 산수를 배경으로 삽입한 점이 특징이며 여기에 해학적 분위기, 정서를 더욱 가미해 풍속화에서 큰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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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후기 화가 김득신은 1754년도에 출생하여 1822년도에 사망한 무관겸 화가였습니다.

    도화서 화원 출신이었고 자연과 풍속화에 능했는데요. 대표적으 파적도, 긍재풍속화첩, 풍속팔곡병 등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는 움직이는 듯한 묘사로 드라마틱한 작품들을 남겼으며,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김득신의 작품은 대부분 풍속화와 인물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림 속 인물들은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화가라고 알려졌지만 김득신의 회화적 능력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회가라고 불려도 될정도로 매우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인물의 표정과 몸짓을 잘 묘사하여 그림 속 인물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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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득신은 흔히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화가로만 이야기되어 왔으나 그의 회화적 기량은 조선 후기 도화서를 대표하는 화가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그의 화풍을 보면 초기에는 김응환을 통해 집안의 화풍을 계승하였고, 이후에는 김홍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도석인물(道釋人物), 산수, 영모(翎毛) 등에서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으나 풍속화의 경우 더욱 두드러진 영향을 보입니다. 그는 김홍도의 후기 풍속화풍을 계승하는 동시에 산수를 배경으로 삽입한 점이 특징입니다. 여기에 해학적 분위기와 정서를 더욱 가미하여 풍속화에서 김홍도 못지않은 역량을 발휘하였습니다.


    김득신은 1772년『육상궁시호도감의궤(毓祥宮諡號都監儀軌)』부터 의궤에 이름이 나타납니다. 이때 나이는 18세로서 이후 꾸준히 의궤에 이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1791년 정조어진의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리는 데에 이명기(李命基), 김홍도(金弘道), 신한평(申漢坪) 등과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같은 공필(工筆)의 고사도(故事圖)를 남기고 있어 다양한 화풍을 구사한 화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파적도(破寂圖)」(간송미술관 소장), 「긍재풍속화첩」(간송미술관 소장), 「귀시도(歸市圖)」(개인 소장), 「오동폐월도(梧桐吠月圖)」(개인 소장), 「풍속팔곡병(風俗八曲屛)」(삼성미술관 리움), 「신선도」(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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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도화서 화원 출신으로 초도 첨절제사(椒島 僉節制使)에 이르렀다. 자연과 풍속화를 잘 그렸는데 심사정, 정선과 함께 영조 때의 삼재(三齋)로 불렸다. 화적으로는 덕수궁 미술관 소장 <곽분양자 행락도>(郭紛陽子 儀行樂圖),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부취도>(扶醉圖), <귀시도>(歸市圖), 간송 미술관 소장 <풍속화첩>, <숙상야우도>(潚湘夜雨圖), 개인 소장 <오동 폐월도>(梧桐吠月圖) 등이 있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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