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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angel
Youangel23.12.25

2.8독립선언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1919년 2월 8일 일본도쿄에서 우리나라 독립선인이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이것을 준비한 배경과 경과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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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2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학생들이 주도한 독립선언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해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독립선언서,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일본 의원들, 조선총독부, 각 신문사 및 잡지사 등에 우편을 보냈다”며 “오후 2시, 일본의 심장부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대회를 개최해 조국 독립과 항일투쟁의 의지를 담은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는 활동을 상세하게 전했습니다.

    특히 “시가행진을 진행하려 했으나 일본 경찰이 강제 해산시켰고, 주도자들은 체포돼 감옥생활을 하게 됐다”며 “하지만 유학생들은 지속적인 독립선언을 이어갔을 뿐만 아니라, 조선으로 돌아가 3·1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의의를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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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2.8. 독립선언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사건으로 동경 YMCA 회관에 모여든 조선 재일 유학생 400~600여 명 앞에서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이광수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를 백관수가 낭독했습니다. 참여한 사람은 장영규, 최팔용, 윤창석, 김철수, 백관수, 서춘, 김도연, 송계백, 윤치영, 정공균, 변희용, 강종섭, 이정훈, 이봉수, 김승민 등이 참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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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남녀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한 사건.

    도쿄 조선청년독립단이 주동한 것으로, 대표는 최팔용·윤창석·김도연·이종근·이광수·송계백·김철수·최근우·백관수·김상덕·서춘 등이었다. 이들은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받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국유학생 대회를 열고, 6백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최팔용이 대표로 나가 이광수가 작성한 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일본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려다가 일본경찰의 제지로 실패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만국 앞에 독립됨을 선언하노라」고 시작되는 <2·8독립선언서>는 한일합방이 한국민의 뜻에 반하는 것인만큼 일본은 한국을 독립시킬 것,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한국합병을 솔선 승인 한 죄가 있으므로 속죄의 의무를 질 것,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우리 민족이 생존을 위해 자유행동을 취해 독립을 달성할 것 등을 선언했다.

    4개항의 <결의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본단은 한일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요란케 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②본단은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여 대회의 결의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판결할 기회를 요구함.

    ③본단은 만국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이 목적을 달하기 위해 일본에 주재한 각국 대·공사에게 본단의 의사를 각 그 정부에 전달하기를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명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함. 우 위원은 이미 파견된 우리 만족의 위원과 같은 행동을 취함.

    ④앞의 모든 항목의 요구가 실패될 때는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해 영원히 혈전을 선언함. 이것으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우리 민족이 그 책임을 지지 아니함. 2·8독립선언으로 일본경찰은 주동자 60여 명을 체포, 그중 최팔용·김도연·백관수·윤창석·송계백·서춘·김상덕·이원군 등 9명에 대해 일체의 방청을 금지한 재판을 열고 출판법 위반을 걸어 최팔용·서춘은 1년, 그 외는 9개월에서 3개월까지 금고에 처했다. 이 2·8독립선언은 곧장 국내의 민족지도자·학생들에게 알려져 3·1운동을 일으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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