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태후의 남자 김치양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려주세요.
헌애왕후 시절 궁에서 쫓겨나고 김치양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데요.
김치양이라는 인물은 뭐하는 인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 동주,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 황보씨의 외척으로 승려를 사칭하고 천추궁에 출입하여 추잡한 소문이 자자했으므로 성종이 멀리 장배하였으나 목종이 즉위하자 천추태후가 불러올려 합문통사사인을 시켰다가 이어 우복야 겸 삼사사로 임명하자 권력을 남용했습니다.
친당을 요직에 앉히고 뇌물을 공공연히 받아 300여칸의 저택을 짓는 등 횡포가 심했으며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하고자 대량군 순을 살해할 모의를 하다 실패, 다시 유일한 혈통인 목종을 살해하려다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1009년 강조의 정변으로 순이 즉위하자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그의 일당과 태후의 친척 이주정 등은 해도로 유배, 왕과 태후는 충주로 내쫓겼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그는 동주(洞州, 현 황해도 서흥군) 출신으로 천추태후의 외가 쪽 친척이다. 고려 왕실의 친척이라는 점 때문에 동주 지역의 유력 호족이었던 김행파(金行波)의 후손이었음이 유력해보이는데 왜냐하면 김행파의 두 딸은 태조의 후궁인 대서원부인과 소서원부인이었고 그도 태조에게 김씨를 사성받아 동주 김씨의 시조가 되는 등 이미 고려 왕실과 인척관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치양은 승려를 사칭하면서 궁궐에 드나들다가 천추태후와 눈이 맞아 그렇고 그런 사이로 발전해서 성종이 유배보냈다고 한다. 천추태후의 남편 경종은 이미 승하한지 오래였고 김치양도 승려를 사칭했다고 하니 일단 부인은 없었던 것 같지만 이건 지극히 현대적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볼 때 생기는 오류이다. 아무리 고려가 재혼이 자유로웠다 한들 왕실 여성, 그것도 왕후라면 문제가 된다. 이는 권력 때문인데 왕의 어머니인 태후가 재혼하면 명분상으로 김치양은 왕의 새아버지와 같은 지위가 된다. 거기다 치양은 왕족도 아닌 김씨였으니 국왕 자신의 정통성, 권위, 권력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는 일이었던 셈이다.
태후가 김치양과 단순히 즐기는 정도였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성종이 승하하고 천추태후의 아들 목종이 즉위하자 김치양은 유배지에서 돌아와서 천추태후의 측근이자 연인으로 공공연히 궁궐을 들락거리다 결국 태후와 아들까지 낳아버렸다. 김치양은 천추태후의 사랑에 힘입어 합문통사사인(閤門 通事舍人)에서 우복야 겸 삼사사의 지위에 오르는데 권세가 대단해져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고 재산을 축적하며 태후의 지위를 이용해 죄없는 신하들을 많이 모함했다. 또한 자신의 집을 자주 늘렸고 뇌물을 받고 관직을 정하였으며 자신의 집과 호수 공사에 백성들을 노임도 주지 않고 마음대로 동원하여 부려먹는 행패를 저질렀다. 목종은 그를 싫어했지만 어머니에게 약했기 때문에 차마 쳐내지 못했는데 김치양의 행동은 점점 도를 넘어서서 목종에게 자식이 없는 것을 기회로 태후가 낳은 자기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기까지 한다.
김치양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태후의 동생 헌정왕후의 아들인 태조의 손자, 당시 왕위에 제일 가까웠던 대량원군 왕순의 목숨을 노리기 시작한다. 목종도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대책을 세우게 되는데 북방 지역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던 장수 강조에게 비밀리에 연락해서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와서 자신을 보위하고 김치양의 세력을 몰아내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러나 강조는 목종까지 폐위하는 강조의 정변을 일으키고 이와중에 김치양은 강조의 군사들에게 붙잡혀 함부로 권세를 휘둘러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세력 및 아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치양은 경종이 죽은 후에 승려 행세를 하면서 천추궁(千秋宮)에 출입하며 천추태후와 추문을 일으켰는데, 성종은 즉위하자 김치양을 유배 보냈다. 다만 그가 실제 화엄종 승려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목종이 즉위한 이후 천추태후는 실권을 장악하고 김치양을 합문지후주2 통사사인주3에 임명하였다. 이후 국왕의 측근이면서 재정을 맡은 우복야주4 겸 삼사사주5(右僕射兼三司使)가 되어 관료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행사하였다. 그는 자신의 세력을 조정에 심었는데, 유행간(庾行間)과 이주정(李周禎) 등을 그의 정치세력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친당(親黨)이 아닌 단지 협조하는 관계였다고 보기도 한다.
김치양은 고려 초 이래 성장한 서경 세력에 속한다고 여겨진다. 그는 목종에게 네 차례나 서경 행차를 하게 하였으며, 그때마다 방악(方嶽)과 주진(州鎭)의 신기(神祇)주4에 대한 재제(齋祭) 의식을 갖게 하였다. 이 조치는 성종대에 있었던 산천(山川)에 대한 제사 삭감을 다시 복구한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출신지인 서흥(瑞興)에 성수사(星宿寺)라는 사당을 지었고, 궁성 서북쪽에 시왕사(十王寺)를 세웠는데, 도교 · 불교 및 토속신앙에 바탕을 둔 곳이다.
1003년(목종 6)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자, 당시 왕위계승에 가장 유력한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 후의 현종)을 승려로 만들어 숭경사(崇敬寺)에 보냈다. 이후 왕순을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긴 후에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 암살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김치양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아들의 왕위계승을 위해 친거란 정책을 주도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1009년(목종 12) 천추궁 옆에 대부(大府)의 기름창고에서 화재가 일어나 천추전이 불탔다. 이 화재는 김치양이 대량원군을 추대하려는 반대 세력을 축출하려는 의도로 저지른 것이라는 견해와 함께, 오히려 반대 세력인 유진(劉瑨) · 채충순(蔡忠順) · 최항(崔沆) · 강조(康兆) 등이 김치양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화재에 큰 충격을 받아 병이 난 목종이 정무를 보지 않자 김치양은 반란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이 계획은 유충정(劉忠正)의 밀고로 드러났다. 목종은 최항 · 채충순 ·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에게 신혈사에서 대량원군을 맞아들이게 하였고, 서북면 도순검사주6 강조(康兆)에게 군사를 이끌고 입위(入衛)할 것을 지시하였다. 강조는 무장병력을 이끌고 김치양과 그의 아들을 죽이고, 목종을 폐위한 후에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렸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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