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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14

과거 중국의 국민당은 왜 본토에서 공산당에게 밀려났나요?

중일전쟁 때 전쟁을 국민당이 주도하였고 중국 국토의 대부분을 국민당이 관리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어떤 과정에서 공산당이 국민당을 본토에서 축출할 수 있었나요? 그 과정이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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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금킹 시계퀸
    순금킹 시계퀸23.08.15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국의 원자탄 으로인하여

    일본이 항복하고 전쟁은 끝났지만 공산당은 소련군이 진주해있던 만주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세를 정비하고 있었고 이러한 공산당의 움직임을 눈치 챈 장제스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중국의 공산화를 두려워한 미국은 많은 무기와 자금을 지원해줍니다. 그러나 국민당 군의 장성들은 그러한 지원 무기들을 빼돌려 오히려 공산군에 팔아먹고 전쟁 후 피폐해져있던 민중들을 수탈합니다. 전쟁후 기아상태인 중국은 국민당원들이 민중들을 수탈하고 먹을 것들을 뺏어가자 민심은 완전히 공산당으로 기울어졌고 다시 국공 내전이 벌어지자 민심을 잃은 국민당은 결국 본토에서 쫓겨나게 된겁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세기 후반, 열강에 의하여 중국이 반식민지화되고 청조(淸朝)의 지배가 동요되기 시작했을 때, ‘멸만흥한(滅滿興漢)’을 기치로 하는 정치세력이 대두하였다.


    쑨원은 1894년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여, “만주의 적(賊)을 제거하고, 중화를 회복하여, 합중정부(合衆政府)를 창립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흥중회는 화흥회(華興會) ·광복회(光復會) 등의 혁명단체와 합병하여, 1905년 도쿄[東京]에서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총리 쑨원)로 발전하였다. 중국혁명동맹회는 삼민주의를 강령으로 하고, ‘청의 타도, 중화 회복, 민국 창립, 지권(地權) 평균’을 주장하였다.


    동맹회 성립 후 혁명의 기운이 높아가고 내전이 속발하여, 1911년 우창[武昌] 봉기를 계기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1912년에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하였다. 쑨원은 총통으로 취임하였으나, 바로 북방군벌과 열강의 후원을 얻은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쑨원은 비밀결사인 중국혁명 동맹회를 공개적 정당으로 개편했으나, 위안스카이 일파의 어용정당 공화당(共和黨)의 조직화에 대항하여 마침내 국민당(國民黨)을 결성하였다.

    국민당은 1913년 2월 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으나 위안스카이의 쿠데타에 의해 해산되었고, 쑨원은 일본에 망명하여 1914년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하고, 1919년 ‘5 ·4운동’의 영향으로 본부를 도쿄에서 상하이[上海]로 옮겨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이라 개칭하였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과 1921년의 중국공산당의 성립, 5 ·4운동 이후의 대중운동의 고조는 쑨원에게 군벌과 손을 끊고 대중과 결합하는 방침을 취하게 하였다.


    1924년 국민당 제1기 전국대표대회에는 마오쩌둥[毛澤東] 등 공산당원도 대표로 참가하였다. 대회는 삼민주의를 실현하는 방도로서, 소련과의 연합, 공산당과의 연합, 노동자 ·농민을 돕는 3대 정책을 결정하였다. 또 광둥[廣東]에 혁명정부와 혁명군사학교를 창설하였다. 이 시기의 국민당은 공산당과 제휴하고, 국민 각 계층을 대표하는 통일전선적 정당이었다. 1925년 쑨원의 병사 후, 국민당 내부의 좌우(左右) 대립의 격화와 노농운동의 고조(高調)에 놀란 열강과 지주 ·자본가들은 장제스[蔣介石]를 주축으로 하는 우파를 지지하였다.

    1927년 4월 북벌군사령관인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南京] 정부를 세우고, 좌파와 중공과의 연합정권인 우한정부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지주 ·자본가들의 요청으로 좌우 양파가 합쳐서 공산당 및 노동조합 ·농민조합을 불법화하였다. 또 일본의 만주침공 때임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다하여 장시성[江西省]에 소비에트 정부를 세운 중공의 공격에 나섰다. 1936년의 중일전쟁과 시안사건[西安事件]을 계기로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내전은 재연되었다. 1949년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에 패해 본토(중국 대륙)를 상실하고, 타이완[臺灣]으로 옮겨 중앙집행 ·감찰 양 위원회의 직권을 정지시키고, 철저한 반공 ·반소정책을 취하여 본토수복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1969년의 제10기 대회에서는 당장(黨章) ·정강의 수정이 행해져 제8기 대회에서 설치된 부총재의 직위는 폐지되었다. 현재에도 국민당은 삼민주의에 바탕을 둔 5권분립의 헌정(憲政)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1971년의 유엔에서의 중국 대표권의 경질 등으로 본토의 회복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이다.

    출처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