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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석화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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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공주명학소의 난이 발생한 이유는 뭔가요?

역사관련 영상을 보던와중에 고려시대 민란들에 대한 얘기를 듣던 와중에 망이.망소이의 난으로 불리우던 공주명학소의 난에 대해 언뜻 들었습니다. 망이.망소이의 난이 발생한 이유는 뭔가요?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분상의 차별대우로 인한 난으로 보입니다.

      소란 향이나 부곡과 같은 고려시대의 특수행정구역의 하나로, 금·은·동·철 등의 자연자원을 공급하거나 자기·종이·기와 등 특수한 수공업 공물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전국 대부분이 농경을 주산업으로 하면서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려 사회에서 소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의 공급을 담당하는 지역으로 설정되어 있었고, 따라서 이 지역에 대한 수취는 일반적인 군현에 비해 과중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특수행정구역에 소속된 백성들은 일반 군현의 백성들에 비해서 법적으로도 신분상에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명학소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유성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 일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이 일대가 지하자원이 생산되는 곳이 아니며, 바다에 인접한 곳도 아닌 것으로 보아 명학소는 수공업 집단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탄방동(炭坊洞)이라는 지명이 숯방이·숯뱅이, 즉 숯을 굽는 마을이라는 뜻의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임을 보아 숯을 생산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난을 주도한 망이와 망소이가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으로 미루어보건대 소민으로서 하층의 신분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망이와 망소이가 거주하던 소는 고려의 일반행정 구역인 주, 군, 현과 다른 특수행정 구역으로 농경 대신 특산물 제작과 공납에 특화되어있었고 소에서는 지역 특성에 따라 금, 은, 철, 명주, 종이, 기와, 숯, 도자기, 차 등을 생산했습니다.

      소의 주민들은 천민과 다를 바 없는 대접을 받으면서 각종 부담은 일반 군현민보다 무거웠고, 망이,망소이라는 이름의 망 자부터 망했어요 할때 망인것만 봐도 처우가 어땠는지 짐작이 되며 이들의 불만이 누적된 것이 하나의 원인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망이·망소이 난은 무신집권기인 1176년(명종 6)에 충청남도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 등 농민과 천민들이 신분제의 타파를 목적으로 일으킨 봉기이다. ‘공주 명학소의 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난의 여파로 1176년 3월에는 충청남도 천안 지역에 있던 홍경원이 불타기도 하였다

      무신집권기에 서북면 지역에서 조위총(趙位寵)[?~1176]이 병사를 일으킨 일로 촉발된 농민 항쟁이 한창일 무렵, 남부 지역에서도 이른바 ‘남적(南賊)’이라고 통칭되는 농민 항쟁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1175년(명종 5) 8월에 이미 승선(承宣) 송지인(宋智仁) 등이 남적 석령사(石令史)와 몰래 통하여 정변을 꾀하였다는 거짓 고발에 의해 당사자들이 섬으로 유배된 일이 있었고, 11월에도 문신(文臣)이 남적과 함께 난을 도모한다는 무고(誣告)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유배당한 사실이 있었다. 한반도 남부의 항쟁 중에서 가장 기세를 떨친 것은 1176년(명종 6) 정월에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망소이 난이었다.

      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