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왜구(倭寇)는 고려말, 조선초에 가장 심했고, 특히 고려 말 약 40년간은 피해가 커서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왜적의 침입은 삼국시대에도 빈번하였으며 그 피해도 적지 않았다. 왜구는 ‘왜가 도둑질한다’는 뜻이지만, 고려말 이래 그들의 약탈 행위가 잦아지면서 왜인들의 해적 행위를 표현하는 명사가 되었다. 왜구는 남북조 혼란기의 남조 세력권에 있던 규슈〔九州〕일대의 일본인들로서, 주요 근거지는 쓰시마〔對馬〕·마쓰우라〔松浦〕·이키〔壹岐〕등 지역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 중에는 왜구가 일본인과 고려인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14세기 중엽 이후 왜구가 크게 세력을 키워 한반도는 물론 중국 연해안까지 침략하게 된 것은 동아시아 정세 변화와 이와 관련된 일본 국내의 정세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14세기 중엽에 들어 원이 쇠퇴하게 되자, 원의 일본침입 이후 전제화되어 있던 일본은 남북조의 내란기에 접어들게 되는데, 남조 세력권에 있던 일부 지방세력들이 해적화하여 한반도와 중국 연해안을 침략하였다. 일본 사회 내부의 모순이 국내에서 통제되지 못하고 국외로 공격성을 띠게 된 것이다.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일본에서 해적이 크게 발생한 원인 중 하나는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중국 대륙에서는 몽골족의 원이 쇠퇴하고 1367년에 한족왕조인 명이 건국하였으나, 북원과의 패권 경쟁으로 왜구 문제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고려는 원간섭기에 원의 간섭과 감시로 자체의 군사력을 갖추기가 어려워 국방이 약화되어 있었다. 1356년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단행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지만, 약화된 군사력을 일거에 회복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더하여 다시 고려에 압력을 가하려는 북원과 중국대륙의 신흥국인 명과의 외교관계 긴장으로 왜구 침입에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