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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때까치29
굳센때까치2923.09.24

이중섭 화가의 생애와 인생 이야기가 궁금한데요.

이중섭 화가의 생애와 인생 이야기가 궁금한데요. 그의 출생부터 예술 경력 형성까지의 주요 사건과 경험 등 인생 이야기가 작가의 예술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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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중섭은 일제시대에 태어나 6.25전쟁까지 겪으며 가족과 생이별도 하며 이러한 고난의 인생 속에서 평화로운 나날들을 염원하는 마음이 그림에 표현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출생,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작고해 출생지인 평원을 떠나 외가였던 평양으로 가족 모두 거처를 옮겨 평안남도 평양에서 성장, 외조부는 평양 내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사업이 아주 번장했다고 하며 사업 종류가 일제시대에 꺼리낄 일이 없는 종류라 어릴 때부터 어려움은 전혀 모르고 편안한 유년시절을 보낸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 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 오산학교에서 서양화가인 임용련으로부터 미술 교육을 받은 이중섭은 본격적으로 미술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며 민족 정기에 대한 교육을 받은 이중섭은 일본에서 개최되는 미술전에 작품을 제출하게 되는데 오산학교 시절 민족교육의 영향을 크게 받아, 작품의 주제를 황소로 잡고 황소를 소묘하는 작품으로 참가하게 됩니다.

    당시 황소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황소라고 할 정도로 민족정서를 대표하는 동물이라 일본인들이 일부러 소에 관련된 표현자체를 못하게 하는 분위기였는데 이런 분위기를 보란듯이 비웃으며 작품을 그렸습니다.

    첫 작품이라 전시 때 비교적 그림 크기를 크게 그려내는 기조를 알면서도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소를 그린 그림을 본 일본의 한 기자는 이중섭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보고 감탄했다고 하며 특히 소 그림의 낙관에 중섭 이 아닌 둥섭이라고 씌어있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는 당시 친일파로 변절한 조선인 문학가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게재한 머리를 중처럼 밀고 전쟁에 참가하는 아름다운 청년이 되자 라는 논조의 사설을 보고 중섭의 본인 이름에 발음이 같은 중자도 부르기 싫고 부끄러운 일이라며 분노해 낙관의 이름까지 바꿔 써낸 일화가 있습니다.

    1936년 일본 도쿄 데이코쿠 미술학교에 입학하지만 1937년 자유롭고 혁신적인 분위기의 학풍을 중시하는 도쿄 분카 학원으로 옮겨 졸업, 1941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조선인 화가 이쾌대, 진환, 최재덕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 1943년 자유미술가협회 특별상 태양상을 수상했습니다.

    1945년 고향인 평안남도 평원에 돌아왔으며 1945년 5월 원산에서 일본인 야마모토 이남덕과 결혼 이남덕은 이중섭을 분카 학원 유학시절에 만났고 1946년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로 근무하지만 1주일만에 사직, 같은 해 그의 친구인 구상 등이 펴낸 시즙 응향의 표지 제작을 맡았지만 응향이 퇴폐적, 반인민적, 반동주의적인 작품으로 규정된 필화 사건은 응향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월남해 경상남도 부산, 통영, 제주도 등을 다니며 살았고 통영에서 지낼 때 이중섭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힘든 일생 중 그나마 가장 편안하고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올수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지내는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이중섭은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어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1952년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넘어갔고 그들의 만남은 1953년 이중섭이 부두 노동으로 번 돈으로 마련한 선원증을 통해 일본의 처갓집을 방문해 한 차례만 더 있었을 뿐입니다.그러나 선원증을 갖고 있던 이중섭은 일본에 오래 체류할수 없어 1주일만에 대한민국으로 귀환, 부산, 대구, 통영, 진주, 서울 등을 떠돌며 가난 속에 창작에 매달렸고 1955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시회를 미도백화점에서 열렸으며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에 작품을 마흔가지도 넘게 전시하고 20점이나 판매하는 높은 성과를 거두지만 사기로 한 사람들이 전쟁 후 어려운 형편에 돈으로 주기로 한 작품료를 먹을 것으로 대신하거나 미루고 제대로 돈을 지급하지 않자 결국 손에 쥔 돈은 얼마 안되는 수고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중섭은 자신의 전시회를 도와준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술이나 대접할 수 있는 정도의 수입만 갖게 되고 이로 인해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에 빠지는데 그로 인해 이중섭은 거식증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조현병 증세를 보이게 됩니다.

    1956년 간염으로 인해 서울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41세의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친구들이 수소문하여 이중섭을 찾았는데 이미 시신과 밀린 병원비 청구서만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태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중섭(李仲燮, 1916년 4월 10일 ~ 1956년 9월 6일)은 한국의 화가로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전쟁까지의 격동기를 살았으며, 짧은 생애 동안 한국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대표적인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 송천에서 부농인 아버지 이희주와 어머니 안악 이씨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1931년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1936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문화학원으로 옮겼는데, 문화학원에서 이중섭은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강렬하고 역동적인 화풍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1941년 일본에서 귀국한 이중섭은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로 잠시 근무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이후 서울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한국 근대미술의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중섭은 가족과 떨어져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전쟁의 참상을 그린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전쟁 후 이중섭은 가족을 다시 만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1956년 40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화풍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일제강점기부터 1940년대까지의 야수파적인 화풍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전쟁 이후의 민족적인 화풍입니다.

    야수파적인 화풍은 강렬한 색채와 자유로운 붓질이 특징이며, 소, 말, 가족 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통해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했습니다.


    민족적인 화풍은 한국의 전통적인 미를 바탕으로 한 화풍으로 은박지와 풀을 이용한 독특한 기법으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

    <황소>

    <길 떠나는 가족>

    <소와 어머니>

    <빨래터>


    이중섭은 한국 근대미술의 대표적인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이라는 격동기를 살면서도, 한국적인 정서와 민족적인 미를 표현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이중섭의 작품은 한국인의 삶과 애환을 담고 있으며,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