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세조가 유자광을 총애했던 이유가 뭐였을까요?
유자광이 경복궁의 말단 문지기임에도 불구하고 단 이틀만에 세조의 겸사복이 되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기 위한 중신 회의까지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아무 경험없는 유자광에게 별동대까지 맡겼는데요.
세조의 총애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기 전인데도 무엇때문에 이렇게 파격적으로 유자광을 밀어줬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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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기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자광은 가문의 견제를 피해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다가 무예에 일가견이 있었는지 경복궁 건춘문을 지키는 갑사(甲士)가 되었다. 이후 1467년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세조에게 상소를 올려 공을 세울 기회를 줄 것을 청했고 그를 만나 직접 무예를 선보이며 무용을 드러냈고 이를 보고 크게 마음에 들어한 세조 덕에 연락관에 임명되어 남이의 휘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다. 이후에도 1467년 건주여진 이만주를 토벌할 때도 공을 세웠는지 이만주의 수급을 벤 장수가 유자광이라는 다산 정약용의 기록도 있다. 이시애의 난과 건주위 토벌전 이후로 세조에게 큰 총애를 받아 벼슬이 정5품인 병조정랑[8]에까지 이르렀는데 모든 과정이 단 3개월만에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