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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요셉
꿈꾸는요셉23.02.28

유관순 열사가 어린나이에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내일이 국경일인 3.1이라서 그런지 유관순 열사가 생각나더라구요. 3.1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의 나이를 보니 당시18세 였더라구요..

너무 어린 나이라 일본군이 무서울수도 있었는데 그토록 독립운동에 열정적이였다니 너무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유관순 열사가 이토록 독립운동에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었던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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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5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2.2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18세 소녀였습니다

    일본에게 나라를 뺏긴 억울함과 눈앞에서 부모님이 일본인의 총과 칼에 죽는 모습을 보고는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일본이 얼마나 못된짓을 하는지도 잘 알 수 있었죠.

    그래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가서 만세운동을 주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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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일본의 가혹한 무단정치를 보면서

    유관순 열사는 프랑스 잔 다르크와 같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후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3·1운동)이 일어나자 동료 학생 6명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 탑골공원과 남대문역 등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3월 10일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독립선언서를 숨겨 고향으로 내려갔으며, 그곳 유림대표와 집성촌 대표 등과 함께 4월 1일 정오를 기해 아우내 장터(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에 있는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키로 모의했다. 그리고 3월 30일 매봉에서 만세운동을 알리는 봉화를 올리고 다음날인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일일이 나눠준 뒤, 3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 시위 주동자로 일경에 체포됐다.

    더욱이 유 열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날 일본 헌병이 휘두른 총검에 학살당했고, 열사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공주 감옥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에 지하감옥에 감금돼 무자비한 고문을 받다가 1920년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관순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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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관순의 아버지는 유중권으로 자신의 사비로 고향에 학교를 지어 교육운동을 하던 계몽운동가였고 개신교 교인으로 마을의 유지들과 협력하여 교회도 세우며 교육 및 계몽활동에 많은 힘을 쏟은 인물로 유관순 열사 또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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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충난 천안군 동면 용두리에서 1918년에 태어나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 학당 고등부에 장학생으로 입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일제의 가혹한 무단 정치를 보면서, 프랑스의 잔다르크 와 같이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고, 그후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동료 학생 6명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고, 3월 10일 임시 휴교령이 내려지자 독립선언서를 숨겨 고향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유림대표등과 함께 4월 1일 정오에 충남 천안 병천면에 있는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진행하기로 모의했습니다.

    그리고 3월 30일 매봉에서 만세 운동을 알리는 봉화를 올리고, 다음날인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준뒤, 3,000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 주동자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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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6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인 감리교회 선교사인 사애리시 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장학생으로 편입하고 1919년에 이화학당 고등부에 진학하였는데 3월1일 3.1운동에 참여하고 3월5일의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고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천안에 내려와 후속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지방 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으로 확정되었고 일제의 교도소에서 2910년 9월 28일에 순국하였는데 유관순은 기독교 사상으로 무장이 된 학생으로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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