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는 1394년 당시 정안군이었던 이방원을 따라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습니다. 아무도 수행하려 하지 않았던 호송을 자청했으며 누구도 정안군을 예로 대하지 않았으나 그만 홀로 정안군을 예로써 대하였습니다. 1396년 문춘추관 태학사로서 도병마사에 임명되어 대마도를 정벌하고 돌아왔습니다. 정도전의 급진적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끼고 정도전 및 그의 친한 동생 남온하고도 거리를 두었습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도전의 충실한 협력자였던 남온과 달리 정안군이 그를 자신의 사가로 보내어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후 잠시 의령으로 쫓겨났다가 복귀하였습니다. 태종 이방원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는데 총대를 매었고 후에 태종이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했을 때도 발빠르게 움직여 뜻을 받들었습니다. 여러 관직을 두루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습니다. 남재의 초상에 세종이 문상을 올 정도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