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산가족 찾기 운동의 배경과 성과는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1980년대 KBS 1 이산가족 찾기 방송은 그 방송의 배경이 무엇이고 그리고 성과는 어떠했는지 그 결과가 궁금합니다? 많은 이산가족들이 상봉을 성공하셨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생방송 과정에서 에피소드는 물론, 안타까운 사연들도 많이 접수를 하러 왔다가 공개홀에서 가족을 찾은 이도 있었으며 3번씩이나 동명이인으로 확인되어 가족을 만나지 못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 이산가족 찾기 방송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그해 11월 14일까지 총 453시간 45분동안 방송됨으로써 단일 주제 생방송 기록을 남겼고, 총 10만 952건의 신청건수가 접수, 1만 180여 이산가족이 상봉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방송공사 아침방송 프로그램인 ‘스튜디오 830’는 6·25 연속 기획물로 6월 21일에 ‘아직도 내 가족을 못 찾았오’를 방송했다. 출연자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이산가족의 고통과 절절함을 인식하게 되고 반응이 대단했다.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한국방송공사 방송에서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라는 타이틀로 생방송했다. 방송 첫날 폭발적인 반응으로 당초 예정된 2시간의 시간에 2시간 30분이나 더 연장 방송했다. 한국방송공사는 모든 정규방송을 취소한 채, 5일 동안 ‘이산가족찾기’라는 단일 주제로 릴레이 생방송을 진행하였다. 이 기간 동안 78%라는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후 7월 10일부터 해외 동포를 위한 생방송도 실시되었다.
이 방송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그해 11월 14일까지 총 453시간 45분 동안 방송되는 기록을 남겼다. 총 100,952건의 신청건수가 접수되어 10,180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하였다. 한국방송공사 사옥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가족을 찾는 벽보가 나붙었다.
1990년 1월에는 사할린방송국-서울-대구KBS를 연결하는 3각 위성방송을 통해 ‘사할린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어 일제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간 사할린 동포와 국내 거주 가족들이 화면을 통해 상봉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등 갖가지 계기를 통해 이산가족문제가 생겨났지만 그동안 방치되고 있었다. 국가나 언론이 이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어야 했다. 당시 한국방송공사는 어용방송이란 오명을 들었지만,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통해 공영방송으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감당했다.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은 1985년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으로 시작된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현실화되는데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방송공사가 이산가족찾기특별생방송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하고자 신청하였으며, 2015년 10월초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회의에서 관련 기록물을 심사 완료하여 10월 9일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산 가족 찾기 운동은 1980년 전에도 꾸준히 시행되어 왔으나 전국망을 통해 KBS 1TV에서 사상 최고 시청률이 78%으로 경신하였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단일 주제 생방송으로는 453시간 45분을 기록하였다고 하며 100,952건의 이산가족이 신청하고 53,536건이 방송에 소개되어 10,189건의 이산가족이 상봉했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볼수 없는 분단 국가만의 아픔의 역사 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80년대 초 경찰이 보유 중인 각종 주민등록 자료들이 전산화되면서 빠른 검색이 가능해졌고, 1982년부터 치안본부에서 이산가족 희망자에 대해 이름으로 검색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은 성씨 다양성이 매우 낮아 동명이인이 너무 많아서[13] 어지간한 희귀 성씨가 아닌 이상은 이것만으로 찾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이름과 함께 이를 대조해볼 수 있는 얼굴이나 기타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고, 그래서 이 프로그램이 나오게 된 것이다. 또 1980년 컬러방송이 시작되고 컬러TV의 보급과 1TV의 중계소가 여러 개 있어서 남한 국토 대비 가시청률이 90%대에 육박했고[14] 이산가족 프로그램이 기획된 게 1983년이니 사실상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자마자 바로 한 것에 가깝다. 그만큼 가족끼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의 애절함이 간절했다는 뜻.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는 KBS방송을 통하여 북한 조선적십자회에 남북한간의 이산가족찾기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한적십자사는 이 제의에서 남북 적십자사가 협력하여 남북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1000만 이산가족의 생사와 소재를 확인하고 그들에게 소식을 알려 주며 재회(再會)를 주선하는 등 가족찾기운동을 전개하자는 취지를 밝혔다. 북한측은 이틀 후인 8월 14일 평양방송을 통하여 북한 조선적십자회는 <남북적십자회담> 개최에 동의한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되었다.
1980년대에는
1984년 9월 서울·경기에 내린 폭우로 북한이 수재물자의 제공 제의 후 수락하여 10년 만에 다시 새로운 적십자 회담이 재개되었다. 1985년 5월 〈제8차 회담〉에서 8.15 기점으로 제1차 상호 교향방문단 상호교환제의 하였다. 1989년 9월에서 12월 제2차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협의에 관한 실무접촉이 있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1992년 5월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 및 예술단의 서울·평양 동시교환을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북한은 8차례 걸쳐 이루어진 적십자 대표간 실무접촉에서 합의내용과 관련 없는 전제조건을 내세움으로써 교환은 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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