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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6.12

1980년대 이산가족 찾기 운동의 배경과 성과는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1980년대 KBS 1 이산가족 찾기 방송은 그 방송의 배경이 무엇이고 그리고 성과는 어떠했는지 그 결과가 궁금합니다? 많은 이산가족들이 상봉을 성공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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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생방송 과정에서 에피소드는 물론, 안타까운 사연들도 많이 접수를 하러 왔다가 공개홀에서 가족을 찾은 이도 있었으며 3번씩이나 동명이인으로 확인되어 가족을 만나지 못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 이산가족 찾기 방송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그해 11월 14일까지 총 453시간 45분동안 방송됨으로써 단일 주제 생방송 기록을 남겼고, 총 10만 952건의 신청건수가 접수, 1만 180여 이산가족이 상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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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12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방송공사 아침방송 프로그램인 ‘스튜디오 830’는 6·25 연속 기획물로 6월 21일에 ‘아직도 내 가족을 못 찾았오’를 방송했다. 출연자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이산가족의 고통과 절절함을 인식하게 되고 반응이 대단했다.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한국방송공사 방송에서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라는 타이틀로 생방송했다. 방송 첫날 폭발적인 반응으로 당초 예정된 2시간의 시간에 2시간 30분이나 더 연장 방송했다. 한국방송공사는 모든 정규방송을 취소한 채, 5일 동안 ‘이산가족찾기’라는 단일 주제로 릴레이 생방송을 진행하였다. 이 기간 동안 78%라는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후 7월 10일부터 해외 동포를 위한 생방송도 실시되었다.

    이 방송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그해 11월 14일까지 총 453시간 45분 동안 방송되는 기록을 남겼다. 총 100,952건의 신청건수가 접수되어 10,180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하였다. 한국방송공사 사옥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가족을 찾는 벽보가 나붙었다.


    1990년 1월에는 사할린방송국-서울-대구KBS를 연결하는 3각 위성방송을 통해 ‘사할린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어 일제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간 사할린 동포와 국내 거주 가족들이 화면을 통해 상봉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등 갖가지 계기를 통해 이산가족문제가 생겨났지만 그동안 방치되고 있었다. 국가나 언론이 이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어야 했다. 당시 한국방송공사는 어용방송이란 오명을 들었지만,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통해 공영방송으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감당했다.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은 1985년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으로 시작된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현실화되는데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방송공사가 이산가족찾기특별생방송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하고자 신청하였으며, 2015년 10월초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회의에서 관련 기록물을 심사 완료하여 10월 9일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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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산 가족 찾기 운동은 1980년 전에도 꾸준히 시행되어 왔으나 전국망을 통해 KBS 1TV에서 사상 최고 시청률이 78%으로 경신하였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단일 주제 생방송으로는 453시간 45분을 기록하였다고 하며 100,952건의 이산가족이 신청하고 53,536건이 방송에 소개되어 10,189건의 이산가족이 상봉했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볼수 없는 분단 국가만의 아픔의 역사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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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80년대 초 경찰이 보유 중인 각종 주민등록 자료들이 전산화되면서 빠른 검색이 가능해졌고, 1982년부터 치안본부에서 이산가족 희망자에 대해 이름으로 검색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은 성씨 다양성이 매우 낮아 동명이인이 너무 많아서[13] 어지간한 희귀 성씨가 아닌 이상은 이것만으로 찾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이름과 함께 이를 대조해볼 수 있는 얼굴이나 기타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고, 그래서 이 프로그램이 나오게 된 것이다. 또 1980년 컬러방송이 시작되고 컬러TV의 보급과 1TV의 중계소가 여러 개 있어서 남한 국토 대비 가시청률이 90%대에 육박했고[14] 이산가족 프로그램이 기획된 게 1983년이니 사실상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자마자 바로 한 것에 가깝다. 그만큼 가족끼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의 애절함이 간절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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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는 KBS방송을 통하여 북한 조선적십자회에 남북한간의 이산가족찾기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한적십자사는 이 제의에서 남북 적십자사가 협력하여 남북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1000만 이산가족의 생사와 소재를 확인하고 그들에게 소식을 알려 주며 재회(再會)를 주선하는 등 가족찾기운동을 전개하자는 취지를 밝혔다. 북한측은 이틀 후인 8월 14일 평양방송을 통하여 북한 조선적십자회는 <남북적십자회담> 개최에 동의한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되었다.


    1980년대에는


    1984년 9월 서울·경기에 내린 폭우로 북한이 수재물자의 제공 제의 후 수락하여 10년 만에 다시 새로운 적십자 회담이 재개되었다. 1985년 5월 〈제8차 회담〉에서 8.15 기점으로 제1차 상호 교향방문단 상호교환제의 하였다. 1989년 9월에서 12월 제2차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협의에 관한 실무접촉이 있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1992년 5월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 및 예술단의 서울·평양 동시교환을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북한은 8차례 걸쳐 이루어진 적십자 대표간 실무접촉에서 합의내용과 관련 없는 전제조건을 내세움으로써 교환은 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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