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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참고래164
아리따운참고래16423.12.11

고려거란전쟁 강조라는 인물에 대해 알려주세요.

고려거란전쟁 드라마를 보면 속도감 있게 전개하기 위해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거란국 일부 병사들이 본진을 쳐들어와서 강조랑 그 휘하 장군들을 납치해가는게 말이 되나요?

수 많은 병사들이 있고 보초서는 병사들도 있는데 그렇게 쉽게 뚫리다니 잘 이해가 가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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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조는 대량원군을 숙위하게 위해 목종의 부름으로 출정하였는데, 오히려 목종과 김치양을 제거와 천추태후를 귀향보내고 현종을 즉위시킵니다. 그러나 거란이 1010년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강조는 통주(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30만의 군사로 거란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사로 잡힙니다. 거란 황제 성종은 강조의 인품을 보고 자신의 신하가 되어 권력을 누리자는 제안을 권유했으나 강조는 끝끝내 거절하다 처형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조는 고려 묵종 때 서북면도순검사로 재직중 혁명을 이끌어 묵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거란은 이것을 핑계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해 옵니다.

    이때, 거란의 대병을 맞아 강조는 통주 삼수채에서 거란의 대군과 맞섰습니다.

    초반에 거란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맛본 강조는 거란군을 얕잡아 보고 지휘를 태만히 하여 결국 대패하고 포로로 잡혀 결국 처형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건을 근거로 해서, 드라마에서는 강조의 지휘 태만을 이렇게 묘사한것 같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의 무신.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현종 즉위 후 중대사가 되었다. 거란의 성종이 침입해 오자 행영도통사가 되어 싸웠습니다.

    이듬해 거란의 성종이 목종을 시해한 데 대한 문죄라는 명목으로 4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30만의 군사로 통주에서 싸우다 사로잡혔다. 성종으로부터 자기의 신하가 되라는 회유와 압력을 받았으나, 끝내 거절하고 살해된 인물 입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조는 실제로 거란과 통주에서 싸우던 중

    사로잡혔고 이에 거란의 성종으로부터 자기의 신하가 되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살해당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조는 서북면 도순검사로 목종의 부름을 받고 병사들을 이끌고 개경으로 가던 중 목종이 죽었다는 거짓 보고를 받지만 계속 진군하여 개경에 도착합니다. 천추태후와 불륜상대였던 김치양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목종의 뒤를 이은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을 알아차리고 목종과 천추태후는 유배를 보내고 김치양과 그의 아들은 살해합니다. 목종 또한 유배길에 시해당하고 맙니다. 목종이 후계자로 삼으려던 대량원군(현종)을 왕위에 옹립하였습니다. 거란의 요 성종은 이를 빌미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합니다.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입니다. 손쉽게 개경으로 진군하려 했으나 홍화진에서 양규 장군 등의 분투에 진군이 늦어지게 되고 고려는 현종이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명하여 30만 대군을 내려주어 1차 전투에서 거란군을 물리쳤으나 삼수채전투에서 어이없는 판단착오로 강조가 거란군에게 사로 잡히면서 전세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강조가 거란군에 잡히게 되자 고려군은 크게 흔들리며 거란군에게 패하게 되고 현종은 강감찬의 전략적 후퇴를 받아들여 나주까지 피신하였습니다. 강감찬은 사신으로 요 성종을 찾아가 현종의 친조를 약속하고 군사를 물리게 합니다. 강조는 굴하지 않아 요 성종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