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백제 시대의 면직물이 출토되면서 목화 도입의 원조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목화는 온난하고 건조한 기후인 인도의 고원지대가 원산지인 만큼 장마와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의 기후와는 잘 맞지 않아 극소수만 재배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런 희소성으로 인해 그 용도 또한 높으신 분들의 사치품이나 의례용으로 사용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당장 면직물 유물이 출토된 곳을 보면 절터란 걸 확인할 수 있다. 왕실이나 귀족의 원찰이었다면 의례용으로 사용되었을 확률이 상당히 높아지는 것. 그리고 백제 이후로도 삼국사기 색복지를 보면 통일신라 중기 사람들의 복식으로 견직물, 삼베, 소가죽 등이 주로 언급되고 있으므로 문익점 이전에 면직물이 존재했다 쳐도 그다지 대중적이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동북아시아 기후에 맞게 개량된 퍼진 중국제 종자를 들여와 서민 계층에 대중화한 것은 여전히 문익점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공로 덕분인지 조선 시대에는 공신으로 꼽혔다.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의 목화재배는 1363년(공민왕 12) 문익점(文益漸)이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할 때 목화씨를 얻어 붓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재배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문익점 면화시배지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이다.
목화의 꽃말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 혼수로 목화 이불을 하게 되었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목화하면 우리는 문익점을 머리속에서 떠올립니다. 고려 말 공민왕 때(1360년) 중국을 다녀오는 길에 문익점이 목화씨를 우리나라에 가져와 그의 장인과 함께 재배를 하였다. 문익점이 심은 건 다 실패하였으나, 그의 장인 정천익이 심은 씨가 꽃이 피고 씨가 나와 목화 종대 씨를 얻었다. 이 씨를 기반으로 점점 재배하는 곳이 늘어나, 10년 후에는 전국으로 목화가 퍼졌다. 목화의 재배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 당시 기록에 보면, 동해 바다가 얼었다고 하는 걸 보면, 그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추웠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문익점 이전의 시대에도 목화가 있었을 것을 보고 있다. 다만 문익점이 중국에서 가져온 목화씨는 개량종으로서 한반도에 잘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문익점으로 인해 우리나라에 목화가 널리 재배될 수 있었고 그 공로는 심히 크다. 다만 역사적 사료를 찾아봐도 문익점이 목화씨를 몰래 붓두껍에 숨겨서 가져왔다는 건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