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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20

성덕대왕 신종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요?

제목 그대로 성덕대왕의 신종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의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신종의 특징과 의의에 대해 알려주시고, 평가가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알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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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또는 에밀레종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제작된 동종(銅鍾)으로, 성덕왕을 기리고자 경덕왕 시기 주조를 시작하여 손자인 혜공왕 7년(771년) 12월 14일에 완성된 대종이다.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29호로 지정되었다. 전근대에 만들어 국내에 실물이 현존하는 범종 중 가장 크며 그 높이는 3.75 m, 지름은 2.27 m, 두께는 11∼25 cm이다.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20세기 전까지 한국 최대의 종이었지만, 2008년에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평화의 댐에 위치한 세계평화의종공원에 '세계평화의 종'이 설치되면서 밀렸다.그러나 여전히 성덕대왕신종이 한국을 대표하는 범종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역사

    신라 전제왕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아버지 성덕왕의 공을 기리고자 경덕왕이 왕권강화정책의 일환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즉, 용비어천가와 비슷한 목적. 종에 씐 명문 1037자에는 한림랑(翰林郞) 김필중(金弼重)이 왕명을 받들어 지었다고 시작해서 제작 시기, 제작 동기, 범종의 의미, 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 8명의 이름과 관직, 기술자 4명의 직책과 이름을 설명하고, 성덕대왕의 덕은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었고 어진 사람을 발탁해 백성들을 편하게 해 태평성대를 열었다고 성덕대왕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글씨는 대나마 한단이 쓰고 시명은 김백완이 지었으며 감독관은 대각간 김옹과 각간 김양상이었다고 한다.[3]

    하지만 이 종이 완성되기 이전에 경덕왕은 세상을 떠났고 결국 경덕왕의 아들, 즉 성덕왕의 손자인 혜공왕이 재위하던 771년에야 주조를 끝마쳤다. 그리하여 현재의 경주세무서 자리에 있었던,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 봉덕사에 걸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성덕대왕신종 표면에 새겨진 명문 덕에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서 절의 범종이나 불상을 떼어 녹여버리고 동전이나 화포를 제작하곤 했는데,# 봉덕사의 성덕대왕신종도 녹여 없애버리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이는 세종이 따로 지시해서 막았다.

    봉덕사는 이후 조선시대에 북천에 큰 홍수가 나면서 절은 없어지고 종은 조선시대 한동안 빈 들판 풀 속에 덩그러니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1460년 영묘사(靈妙寺)[4]에 옮겨서 걸었다가, 이후 1506년에 경주읍성 남문 밖 봉황대 밑에 종각을 짓고 거기에 걸어서 성문의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현대에는 1915년 옛 경주박물관[5] 자리로 옮긴 후 경주고적보존회를 거쳐 1975년에 새로 지은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당시 이 거대한 종을 옮기는데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이 종을 트레일러에 실으니 무게는 50톤이 넘어서 최단거리인 월성로를 통과하면 중간에 있는 작은 다리가 50톤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경주 시내를 관통해서 멀리 있는 다리를 타야 했는데, 그러면 트레일러에 실린 종의 높이가 6미터가 넘어서 경주시내 전깃줄이 모두 걸리는 것이었다. 결국 한국전력공사에서 전공들이 다수 동원되어 에밀레종을 실은 트레일러가 지나갈 때마다 전깃줄을 끊어주고 지나간 다음에 다시 이어주는 식으로 했고, 성덕대왕신종이 경주 시내를 지나가는 동안 10만 시민들이 종이 옮겨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모여서 천천히 가는 트레일러를 따라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출처: 나무위키 성덕대왕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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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종신의 상하에는 견대(肩帶, 上帶)와 구연대(口緣帶, 下帶)를 둘렀고, 그 속에 주로 보상당초문을 주문양대(主文樣帶)로 장식하였으며, 특히 하대에 속하는 구연대는 종구(鐘口)가 팔능형(八稜形)을 이룬 특수한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팔능형의 윤곽형이 되는 능(稜)마다 당좌(撞座)와 유사한 대형 연화를 배치하고 있는 것이 또한 특징입니다.


    견대 밑으로는 4개소에 연주문 안에 견대에서와 같은 보상당초문양으로 조식된 유곽을 둘렀으며, 그 내부에 돋을새김 연화로 표현된 9개의 유두(乳頭)가 들어 있습니다. 이 유곽 밑으로 종신에 비천상(飛天像) 2구(軀)를 상대적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 서로 어긋나게 8판(瓣)의 연화당좌 2개를 배치하였습니다.


    오대산 상원사동종의 명문이 동종의 정상부인 천판 (天板)에 명기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종신에 장문의 명문이 돋을새김되어 있는 것은 신라동종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특징입니다.


    전체적인 동종의 조각수법은 동양 어느 국가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거종인 동시에 상원사동종과 더불어 최대의 조각양식을 구비한 동종입니다. 종신에 2구씩 마주보는 4구의 비천상은 연화좌 위에 무릎을 세우고 공양하는 상으로서 주위에 보상화(寶相花)를 구름과 같이 피어오르게 하고, 천상(天上)으로 천의(天衣)와 영락 등이 휘날리고 있는 것은 다른 신라동종에서는 볼 수 없는 훌륭한 비천상으로서 한국비천상의 대표가 되는 조각수법입니다.


    종정(鐘頂)의 용통(甬筒), 즉 음관에도 몇 개의 단(段)을 두어 단마다 앙련과 복련으로 된 화려한 연판(蓮瓣)이 장식되어 있고, 용뉴의 용두(龍頭)와 몸체도 박진감 있고 사실적인 조각수법으로 생동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 동종의 명문 내용과 종의 형태가 고유섭(高裕燮)의 해석에 따르면 “팔화(八花)는 팔음(八音)을 상징하였으리라. 화엄의 유(乳)를 없애고 36화(花)를 안배함은 삼귀계(三歸戒)를 옹호하기 위한 36선신(善神)”고 한 것은 이 신종의 법기(法器)로서의 존재이유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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