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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이라이763
프로파이라이76323.06.13

1498년 연산군 시절있었던 '무오사화'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요?

조선 시대이 만들어지고 나서 짧은 시간안에 네차례의 사화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1498년 연산군 시절있었던 '무오사화'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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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종은 조선건국 이후 중앙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당시의 사회개혁을 위해 김종직을 비롯한 신진사류를 등용했는데 이들의 절의를 중시하여 단종을 폐위하고 살해한 세조와 그의 공신들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세조의 공신들을 제거하고자 계속 상소했습니다 . 반격을 노리던 훈구파는 성종에 이어 연산군이 즉위해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실록청을 설치하고 이극돈을 당상관으로 임명하자 신진사류였던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를 문제삼았으며 그것은 그의 스승이었던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으로 중국사에서 항우가 초나라의 의제를 폐한 것과 단종을 폐위하여 죽ㅇ니 사건을 비유, 단종을 조위한 글이었습니다.

    이극돈은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유자광, 노사신, 윤필상 등과 모의 , 김종직이 세조를 비방한 것은 대역부도한 행위라고 계를 올렸고 이에 연산군은 이 사건이 모두 김종직의 교사에 의한 것으로 결론짓고 우선 김종직을 대역죄로 부관참시하고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신진사류를 죽이거나 유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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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은 성종대에 이르러 집권적 관인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유교문화가 그 성숙기에 도달하였다. 세종·문종대에 융성했던 유학은 세조의 무단정치와 불교 숭상으로 한 때 저조했으나 성종대에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성종은 원래 학문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당시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훈구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등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사림파의 종사(宗師)로 명성이 높았던 김종직(金宗直)을 중용하였다. 아울러 그 제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 등 영남 출신의 신진사류를 대거 불러들이게 되었다.


    중앙에 진출한 신진사류는 기성세력인 훈구파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그들은 삼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주자학(朱子學)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부하였다.


    동시에, 요순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도학적 실천을 표방해 군자임을 자처하면서 훈구파를 공격하였다. 즉 훈구파는 불의에 가담해 권세를 잡고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현상 유지에 급급한 보수적이고 고식적인 소인배로 멸시, 배척하였다.


    이에 대해 훈구파는 사림들을 고고자존(孤高自尊: 자신들만이 고결하다고 스스로를 높임.)의 경조부박(輕佻浮薄: 언어 행동이 경솔하고 신중하지 못함.)한 야심배라 지탄하며 배격하였다.


    이로써 두 세력은 자연 각각의 주의와 사상 및 자부하는 바가 서로 달라 일마다 대립하였다. 그 갈등이 날로 심화되어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적대관계로 진전되어 갔다.


    신구 대립인 신진사류와 훈구파의 갈등을 종래에는 양파의 사상적·정치적인 이념의 차이나 감정적인 반목으로만 보아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다음과 같이 현실적인 사회 모순의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면모에도 주의해야 한다는 학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세종대 이후 사전(私田)의 증가에 따르는 토지사유화 진행은 과전법의 모순을 노정시켰다. 관인(官人) 지배층의 토지겸병은 일반 서민의 경제 생활을 압박하고, 나아가 신진사류의 경제 생활까지 위협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성세력인 훈구파는 인척과 정실 등에 의해 벌족을 형성하고, 정권을 농단해 신진사류의 진출을 음양으로 배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 사회의 모든 모순에 직면해 그 부조리를 시정, 개혁하려는 사림파와 구질서를 고수하려는 훈구파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성종이 김종직 일파의 신진사류 인사를 등용해 유교적인 왕도정치를 펴려 한 것도 표면적으로는 그의 호학숭문(好學崇文) 정신에서 결과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사회적 모순과 불합리성을 제거, 시정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적 요청이 있었던 것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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