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최초의 진골출신 왕인 태종 무열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배경이 궁금합니다.
신라시대 초기에는 성골출신만 왕이 되었던 것으로 알고있는데요.
진골출신인 태종 무열왕이 진골출신 최초로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진흥왕에게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동륜, 둘째가 금륜이다. 동륜은 왕 27년(566년)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33년(572년)에 일찍 세상을 뜬다. 이때 그의 아들 백정은 다섯 살 어린 아이였다.
금륜이 형을 이어 태자에 책봉되고, 진흥왕 사후 왕위를 잇는다. 25대 진지왕이 바로 그이다. 그런데 불과 4년 뒤, 황음(荒淫)에 빠진 그를 나라 사람들이 폐위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이때 그에게 용춘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왕위는 동륜의 아들 백정이 잇는다. 26대 진평왕이다.
이렇듯 진흥왕이 죽은 다음 벌어지는 두 아들과 그 후손의 왕위 교차 계승은 결코 평화로운 이어달리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진평왕의 등극에서 이 달리기가 끝난 것도 아니었다. 용춘의 정체와 전후 이야기는 앞서 선덕여왕에서 썼다.
진지왕이 폐위된 까닭에 용춘의 집안은성골에서 진골로 내려앉는 족강(族降)을 당했다. 그런데 아들을 두지 못한 진평왕이 딸을 용춘에게 시집 보낸 것은 뜻밖이었다. 왕위가 용춘에게 갈 수 있다는 전제였다. 그렇다면 이어달리기는 다시 동생 집안 진지왕 쪽으로 넘어가는 것일까.
그러나 여기서 형 집안 진평왕의 야망은 작렬한다. 성골 집단을 더욱 공고히 하여, 왕위 계승은 비록 딸이라 할지라도 이 안에서 이루리라는 각오를 한 것이었다.
용춘을 사위로 삼은 것은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동생 집안의 모반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이런 와중인 진평왕 23년(603년)에 춘추는 태어났다. 성골에 매우 가까운 진골의 아들이었다.
진평왕의 집념은 이루어졌다. 춘추가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29년 뒤 딸인 선덕이 왕위를 이었다. 다시 15년 뒤, 선덕이 죽은 다음에는 그의 사촌누이 진덕이 왕위를 잇는다. 춘추의 나이 어언 44세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왕위계승 이어달리기는 교차가 아닌 한집안의 일방적인 것으로 굳어지는 듯했다.
춘추의 아버지 용춘은 튀지 않고 묵묵히 일했다. 화랑 출신으로 진평왕 51년에는 고구려로 출정하여 낭비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각간이 되었다. 7년 뒤인 선덕여왕 4년에는 왕의 명령으로 지방을 순무했다.
더 이상의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왠지 그에게서 권력싸움의 비정한 늪으로 빠져드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아들 춘추를 지키는 용춘의 울타리였을까.
춘추가 역사서에 전면 등장한 것은 선덕여왕 11년(642년)이다. 나이 서른아홉이 되는 해, 대야성의 도독 김품석과 그의 아내가 백제군에 죽임을 당하는 그 비극적인 사건에서이다.
춘추는 이 사위와 딸의 죽음을 보고받고,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로 하고 고구려로 군사를 청하러 간다. 이때 김유신과는 이미 절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와 결혼을 한 다음일 것이다. 그러나 춘추의 고구려 외교는 성공하지 못했다.
춘추의 데뷔는 썩 상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실패가 춘추로 하여금 자신의 앞길에 대해 보다 깊은 성찰을 하게 했을 것이다.
특히 잘 나가는 성골 앞의 진골로서 자신이 힘을 받기 위해서 제3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김유신의 가야세력과의 연합은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춘추는 선덕왕 16년(647년)에 일어난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춘추로서는 매우 뜻깊은 승리였다.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었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김춘추∙김유신으로서는 차제에 왕위까지 노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번 더 짚어가기로 한다. 그것이 진덕여왕의 즉위이다.
춘추는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등에 업고, 당나라와의 관계 강화를 위해 진덕여왕 2년(648년)에 직접 그곳을 찾아 친당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때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또 한 번의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탄력을 받은 춘추는 귀국 후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하였다.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의 채택(649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의 실시(651년), 품주(稟主)의 집사부(執事部)로의 개편 등이 그것이다.
다분히 중국화 정책이라 불러야 할 이 같은 제도의 시행은 신라로서는 후진적인 정치문화를 극복하고자 한 노력으로 보아주어야겠다. 더불어 언젠가 다가올 자신의 왕정시대를 대비한 것이었으리라.
할아버지인 진지왕은 폐위되었으며, 자신은 진골로 떨어진 최악의 상황을 딛고, 춘추에게는 이제 왕의 길이 다가왔다. 큰 집안 진평왕 쪽으로 이어지던 왕위가 작은 집안 진지왕 쪽으로 무려 80여 년 만에 돌아왔다.
출처 : 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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