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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angel
Youangel23.11.15

고려시대 양규 장군은 어떤 분인지?

안녕하세요? 고려 거란전쟁에서 양규 장군도 큰 공을 세운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처음 듣는 분이지만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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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규는 고려시대의 무신으로, 거란의 성종 군사에게 흥화진이 포위되자 완강히 저항하다 무로대·이수·석령·여리참 등에서 기습해 잡혀가는 백성 1만여 명을 구한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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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중기의 무신으로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때 크게 활약한 인물입니다. 목종 때 여러 차례 승진해 형부낭중(刑部郎中)이 되었으며, 1010년(현종 원년)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당시 양규는 흥화진을 지켜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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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 무신으로 형부낭중을 거쳐 도순검사에 이르러 1010년 거란의 성종군사에게 흥화진이 포위되자 진사 정성, 부사 이수화 등과 완강히 저항, 이에 거란군은 남하하여 통주에서 고려주력부대를 격파, 항복을 권했으나 일축합니다.

    그는 곽주를 공격해 적을 몰아내고 성안의 남녀 약 7000명을 통주로 이동하게 했고 개경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나주에 온 현종의 철병교섭으로 적이 철병하자 구주 방면에서 지키고 있다 구주별장 김숙흥 등과 무로대, 이수, 석령, 여리참 등에서 기습하여 7전7승에 약 7000명을 사살하고 잡혀가는 백성 1만여명을 구합니다.

    이어 애전에서 적을 기습해 약 1000명을 베었으나 대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 삼한후벽상공신에 추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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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10년(현종 원년)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당시 양규는 흥화진을 지켰고 거란이 수차례 항복을 권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고 거란은 통주(通州: 현 평안북도 선천군)를 공격하여 총사령관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을 격파하고 다시 양규에게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강조가 쓴 것처럼 꾸며 흥화진에 보냈으나 "나는 왕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명령은 받지 않겠다."하며 끝까지 성을 지켰다.

    양규는 흥화진에서 군사 7백여 명을 이끌고 통주까지 와 군사 1천여 명을 수습했으며, 밤중에 곽주로 잠입하여 잔류한 거란의 병사들을 급습하여 모조리 죽인 후 성 안에 있던 백성 7천여 명을 통주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수도(개경)가 거란에게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란가게 되었다.

    1011년(현종 2년) 봄 거란군이 철수하게 되자 구주 방면에서 돌아가는 거란군을 지키고 있다가 부하 김숙흥과 함께 거란군을 기습해 2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2,000여명을 구출했으며 석령에 이르러 다시 거란군 2500명을 베고 포로 1000명을 구출하였다.

    여리참에서는 거란군 1,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1,000명을 구출했고 다시 거란의 선봉과 애전에서 싸워 1,000여명을 베었다. 그리하여 고군에서 순월 사이에 7차례나 거란군을 기습해 적 65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백성 3만 명을 구출했으며 헤아릴 수 없는 전리품을 노획했다.

    하지만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져 김숙흥과 함께 거란 성종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 항전하다가 함께 전사했다. 이 전공으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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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노인옥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규 장군은 고려시대의 무신으로 거란의 성종(聖宗) 군사에게 흥화진이 포위되자 완강히 저항하다 여리참, 무로대, 이수, 석령 등에서 기습하여 7전 7승에 약 7,000명을 사살하고 잡혀가는 백성 1만여 명을 구해냈다고 합니다.

    이어 애전(艾田)에서 적을 기습하여 약 1,000명을 베었으나 대군의 공격을 받아 김숙흥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후에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추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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