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2.26

518 민주화운동은 왜 일어나게 된건가요?

제가 딱히 근대사에 대해 잘 알지를 못해서 영화를 보다가 가끔 나오는것만 봤거든요. 그래서 좀 부끄러운데 왜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건가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10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살해됩니다.

    이에 박정희 살해사건 관련 수사를 하던 전두환이 권력의 핵심축으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전두환은 12.12사태로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는 등 쿠데타를 일으키며 권력을 장악해버립니다.

    이에 박정희가 죽고나면 민주화가 될 것이라고 여겼던 많은 대학생들이 대통령 직선제, 민주화 등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서게 됩니다. (80년 초 서울의봄)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이를 진압하고 완전한 권력 장악을 위해 80년 5월 17일 제주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을 내립니다. (전국 각 대학엔 휴교령도 내려지죠. )

    이후 5월 18일 광주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휴교령이 떨어져 문앞을 막고 있던 부대와 대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면서 대학생들은 학교는 학생들의 것이라며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이 과정에서 돌이 날아다니며 투석 행위도 벌어집니다. 이에 전남대에 주둔 중이던 군인들이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5.18 민주화운동이 시작됩니다.

    19일부터는 공수부대가 총에 대검을 꽂아 버스안, 상점안까지 들어가 민간인을 살상하는 등 무자비한 잔혹행위가 이어지게됩니다.


  • 순금킹 시계퀸
    순금킹 시계퀸23.02.26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간단하게 답변 드리겠습니다

    1980년 5월18일부터 10 일간 일어난 사건으로 전두환대통령의 군부 구데타에 대한 항거 민주화를 부르짖다 숨을 거둔 학생시민등이 국가로 부터 큰피해를 입은 사건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5.18 민주화운동의 배경이 궁금하군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쿠테타가 발단이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부끄러운 역사라 할 수 있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이에 박정희 살해사건과 관련된 수사를 하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권력의 핵심축으로 급부상 하게 됩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혼란스러움을 틈타 12.12사태로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는 등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해버립니다.

    이에 박정희 사후 민주화가 될 것이라고 여겼던 많은 대학생들이 대통령 직선제,

    민주화 등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서게 됩니다. (1980년 초 서울의봄)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이를 진압하고 완전한 권력 장악을 위하여 1980년 5월 17일 제주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을 내립니다.

    (전국 각 대학엔 휴교령도 내려지게 됩니다. )

    이후 5월 18일 광주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휴교령이 떨어져 문앞을 막고 있던 부대와 대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면서 대학생들은 학교는 학생들의 것이라며 돌려 달라고 요구했고 이 과정에서 돌이 날아다니며 투석 행위도 벌어집니다. 이에 전남대에 주둔 중이던 군인들이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5.18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19일부터는 공수부대가 총에 대검을 꽂아 버스안, 상점 안까지 들어가 민간인을 살상하는 등 무자비한 잔혹 행위가 이어지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과 민중의 의지를 대내외에 드러내었고 반민주, 군사독재의 야만성을 세계에 폭로함으로써 군사독재체제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으며,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항쟁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으며,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이 한 지역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 저항과 연대로 이어질 때 비로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다른 국가의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네스코는 광주민주항쟁은 1980년대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필리핀, 타이,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등지에서 일어난 여러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군부 독재가 가장 큰 원인입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 및 전라남도에서 시민들이 신군부에 맞서 싸운 대중봉기 형태의 항쟁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라 부릅니다.. 운동 참여자들은 계엄령 철폐,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의 구호를 외쳤으며 공수여단의 강경진압으로 희생자가 발생하자 5월 21일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을 광주 외곽으로 몰아냈지요.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진압작전으로 항쟁은 종결되었습니다. 희생자는 사망자 165명, 행방불명자 65명, 상이 후 사망자 376명 등 606명으로 집계되었으나 암매장자 및 미신고 인원을 고려했을 때에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우선 518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상반된 견해가 존재한다는 점부터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피해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당시 정부와 군의 무자비한 지역 탄압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반대측에서는 적극적인 간첩 소탕 작전 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1979년 유신체제 붕괴에서 촉발된 전국적 민주화 요구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되었다. 운동 지도부는 유신독재와 신군부를 광주 비극의 원인으로 규정했다. 신군부를 '유신잔당'으로, 공수부대를 '전두환의 친위대'로 규정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80년대 한국은 대통령 단독선거, 대학 캠퍼스 내 강력한 경찰력, 언론 검열, 부패한 정치, 경제의 불균형 등의 문제가 증가하면서 시민들의 불만이 높아졌습니다. 특히,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과 야당 사이에 선거 조작 의혹이 제기되자 시민들은 불평을 제기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1980년 5월 17일, 광주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크게 발생하게 됩니다. 학생들이 대학 내 강의를 중단하고 집회를 벌이다가 학교 밖으로 나와 시위를 벌이면서, 점점 광주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이에 따라 시군구청과 경찰 등 공공기관에 불을 지르고, 정부군이 출동하면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에 대한 대처로 5월 18일 전라남도도사 박정희는 공동통치령으로서 공동통치령부를 통해 군을 파견하였고, 이 과정에서 군인과 민간인의 피가 흘러나가며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후, 대학생들을 비롯한 시민들은 민주화와 군사정권의 종식을 요구하며 전국적인 시위를 벌이고, 이어지는 군사정권의 폭력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운동은 계속됩니다.

    이후, 민주화 운동의 과정과 이에 따른 정치적인 변화 등이 있었으며, 결국에는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대한민국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태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1980년대 초반 대한민국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불균형적이었고, 이로 인해 경제와 사회의 문제들이 더욱 심화되어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0년 5월 17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민주화운동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중운동으로, 당시 국방부와 군사정권이 광주시민들을 탄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대학생과 시민들이 합세하여 민주화와 인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러한 시위는 계속해서 확대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결국 군사정권은 민주화와 인권을 존중하겠다는 선언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대한민국은 민주화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문제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인권의 산출물로,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와 정치의 모습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사건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등장한 군사정권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사망과 함께 붕괴됩니다. 이를 틈타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집권이 가시화되었고 민중운동 및 반군부 세력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신군부의 집권으로 인해 더욱 후퇴하고 억압될 것을 우려하여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민주화운동을 시작합니다.

    이러한 활동들은 1980년 5월 초 절정에 이르러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집회와 시위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고 광주에서는 5월 초부터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의 주도로 시국성토대회가 연일 개최되었습니다. 학생들은 5월 14일부터 광주 도심으로 진출, 시민들과 대규모 가두 정치집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전개합니다. 민족민주화성회로 불리던 이러한 집회와 시위는 5월 16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시위가 확산되어 가자 신군부는 5월14일부터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집회와 시위를 진압할 계획을 현실화하였고, 17일 오후 7시에 공수부대 투입명령을 내렸습니다.

    신군부는 5월 17일 밤 11시 40분에 비상계엄이 18일 자정을 기해 전국으로 확대되었음을 발표하는 한편, 전국에서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을 연행하기 시작합니다. 광주에서도 5월 18일 자정이 다 된 무렵부터 십수명이 광주 505보안대로 연행되었고 제7공수여단은 전남대와 조선대에 계엄군으로 배치되어 학교에 있던 학생 112명을 연행, 언론사와 방송국, 비롯하여 광주 시내 주요 기관에 제31사단 군인이 투입되었습니다.

    5월16일 개최된 집회를 해산하면서 약속대로 학생들은 18일 오전에 전남대 정문으로 집결, 전남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학생들의 해산을 종용하였고 이 과정에서 첫 충돌이 발생합니다. 계엄군의 진압을 피해 도심으로 진출한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계엄 확대와 계엄군이 자행한 만행을 알렸고 제 7공수여단에 이어 추가로 파병 된 제 11공수여단은 시위대뿐만아니라 일반 시민에게도 진압봉을 휘둘렀고 무차별 연행을 했습니다. 이에 시민과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계엄군에 맞섰고 도심은 전쟁터가 됩니다.

    제3공수여단이 추가 투입되는 등 계엄군은 계속 늘어났고 발포까지 이루어져 사상자가 급증했습니다.

    시위대는 계엄군의 만행을 널리 알리고 무력에 맞서기 위해 전남 지역으로 진출하기 무기를 얻는데 이 과정에서 5.18민주화운동은 광주뿐 아니라 전남 일원으로 확대되었고 무기를 획득한 시민들은 시민군으로 활약하여 5월21일 시민군은 계엄군을 후퇴시킴으로 27일까지 민중자치가 실현되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시민군은 광주의 치안과 행정 업무를 담당했으며, 다수가 도청에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충정작전을 개시하여 전남도청을 다시 점령함으로써 종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