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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의 말똥구리
땅속의 말똥구리23.06.30

화랑제도는 신라시대 언제부터 생긴걸까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데 화랑들의 공이 컸다고 알고 있습니다. 황산벌의 관창도 그 대표적인 화랑의 예인데요.

이런 신라의 화랑제도는 언제 생긴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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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화랑제도는 진흥왕 때로 기원은 신라에서 제일 외모가 아름다운 여자 둘을 뽑아 그들을 매개로 인재를 모으는 원화제도 였는데 두 원화 남모와 준정간에 서로 간의 시기심으로 살인 사건이 일어나 원화제도는 폐지되었고 이후 같은 역할이지만 여자 대신 곱상한 남자들을 모집해 화랑이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다만 삼국사기에서 화랑제도를 만들었다는 576년 이전에도 사다함 같은 화랑이 존재했으므로 이전부터 신라에 비슷한 개념의 청소년 조직이 존재했고 삼국사기 576년의 기사는 화랑제도를 정립한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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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등에 의하면 삼한시대(三韓時代)에 이미 마을 청소년들이 그들 고유의 집회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견디기 힘든 시련행사를 즐겁게 받았다고 한다. 신라는 4세기 중엽 급속히 국가체제를 정비해갔고, 6세기 우경(牛耕)의 보급에 따라 경작능력에 차이가 생겨 촌락공동체간의 균형이 파괴되고 또 군현제(郡縣制)의 실시로, 종전의 촌락 중심의 청소년조직도 쇠퇴하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중앙정부는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여러 청소년들을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서 등용하려던 제도가 화랑도의 전신인 원화제도(源花制度)였다. 처음 원화 두령으로 뽑힌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은 무리를 300여 명이나 모았으나, 얼마 뒤 서로 시기하는 일이 생겨 이 단체는 화목을 잃어 해산되었다. 화랑도가 국가에 의하여 정식으로 제정된 것은 진흥왕 때부터이다. 당시 신라가 화랑도 제정을 서두른 것은 군대를 보충할 수단으로서 필요하였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화랑도는 이처럼 교육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제도였으나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으며, 종전의 촌락공동체적인 청소년조직의 전통과 중국 율령(律令)의 도입을 통한 관청조직의 원리가 결합된 반관반민(半官半民) 성격의 조직체였다.


    조직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화랑은 전 역사를 통하여 모두 20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화랑도는 시대에 따라 몇 개의 단체가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였다. 화랑집단은 각기 화랑 1명과 승려 약간 명, 그리고 다수의 낭도로 구성되었으며, 낭도의 수는 일정하지 않으나 많을 때는 1000명이 되기도 하였다. 화랑은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직하며 사교성이 풍부한 진골귀족 가운데서 낭도의 추대를 받아 뽑혔다. 승려는 주로 지적·정신적인 면에서 화랑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낭도들은 수도 경주에 사는 6부민(六部民) 출신 자제들이 주축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화랑도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와 같은 혈연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라 혈연을 초월하여 자신들의 의사에 의하여 결성된 일종의 결사체로 일정한 기간을 정해 놓고 단체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구성원들은 경주 부근의 남산이나 금강산·지리산 등 명승지를 찾아다니면서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기르는 한편 도의를 연마하였다. 화랑도는 이러한 조직과 수양을 통하여 독특한 기질과 기풍을 지녔다. 즉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벗을 위하여 죽으며, 대의(大義)를 존중하여 의에 어긋나는 일은 죽음으로써 항거하고, 국가를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함을 찬양하며, 오직 앞으로 나갈 뿐 뒤로 물러섬을 부끄럽게 여겨 적에 패하면 자결할 망정 포로됨을 수치로 아는 등 장렬한 기백과 씩씩한 기상을 함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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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도로서 화랑도의 시작은 576년(진흥왕 37)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미녀 두 사람, 즉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을 원화(源花)로 삼아 받들게 하였는데, 준정이 남모를 질투해 죽이는 일이 발생하여, 대신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이라 하고 그를

    받들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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