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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angel
Youangel23.09.02

을지문덕장군은 살수대첩후 숙청당했다는데

안녕하세요 역사서를 보다가요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대군을 살수대첩으로 전멸시켰는데 그 이후에 고구려에서 숙청당했다는데 맞는얘기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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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 이후 고구려에서 숙청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살수대첩 이후에도 고구려의 장군으로 활약했으며, 614년(영양왕 16)에 사망했습니다.


    을지문덕 장군이 숙청되었다는 주장은 조선 시대에 유행하던 설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설화는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의 침공을 물리친 후, 고구려의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왕이 된 을지문덕 장군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신들을 숙청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설화는 역사적 근거가 없습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살수대첩 이후에도 고구려의 장군으로 활약했으며,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또한, 을지문덕 장군의 사후, 고구려의 정치는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습니다. 따라서 을지문덕 장군이 숙청되었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설화로 볼 수 있습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살수대첩을 통해 고구려의 국운을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의 업적은 고구려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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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0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지문덕에 대한 고구려 고유의 기록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여수전쟁에서의 활약상을 통해 볼 때, 을지문덕은 그 당시에도 이미 상당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나이가 결코 적지 않았다는 의미인거죠. 그런데 여수전쟁 이후에 아무런 기록도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수전쟁에서 활약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 후손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은 아마도 기록 자체가 전해지지 않는다는 문제에다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인해 숙청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물론 이것도 그저 추측일 뿐, 정확한 사실은 기록 자체가 없어서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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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단 살수대첩 이후 기록이 말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짓을 한 게 서기 642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가 된 연개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이는 을지문덕 장군에 비해 작은 공을 세운 장수들에 관한 기록이 고려 중기에 작성된 <삼국사기> 등에 상세하게 남아있거나, 심지어 그런 장수의 장례식에 왕이 직접 조문했다는 기록도 남은 판에 을지문덕 장군에 관한 건 살수대첩에 관한 것만 남아있습니다. 즉, 당시 고구려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을 살수대첩 관련 기록까지 제거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제거를 포기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나마 가장 확실한 건 642년 쿠데타 때 연개소문이 죽인 고구려 대신 100여 명 중에 을지문덕 장군의 아들이나 손자 등 자손이 있었고(살수대첩이 벌어진 612년 당시 수양제도 을지문덕 장군을 알고 있었고, 심지어 고구려의 왕과 동급으로 취급했을 정도니까, 그런 집안이 엘리트 자손을 배출하지 못해 고작 30년만에 몰락했을리는 없을 거고... 자손이 뭔가 큰 죄를 저질러서 몰락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을지XX의 난" 같은 이름으로 남았을 터인데....), 그 자손이 연개소문에 의해 "역적"으로 규정되면서 가문이 멸족당하는 과정에서 을지문덕 장군도 기록말살을 당한 게 아닌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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