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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검은꼬리63
흰검은꼬리6323.01.08

간도가 우리나라 영토였다는 근거가 있나요?

간도가 우리나라 영토였다는 근가가 무엇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빼앗긴거죠

나중에 국제법적으로 찾아 올수 있는지 그 가능성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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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현재 연길이라고 불리우는 지역으로서, 병자호란 뒤에 청나라가 이 지역을 봉금지역으로 정하고 모든 사람의 입주를 금지한 것인데요. 마치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놓인 섬과 같은 땅이라는 데서 간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또, 조선 후기에 우리 농민들이 이 지역을 새로 개간하였으며, 조선의 정북과 정동 사이에 위치한 방향인 간방에 있는 땅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간도는 동서도로 구분되는데, 서간도는 압록강과 송화강의 상류 지방인 백두산 일대를 가리킵니다.

    동간도는 다른 말로는 북간도라고도 하며 혼춘, 왕청, 연길, 화룡의 네 현으로 나누어져 있는 두만강 북부의 만주 땅을 말합니다. 통상 간도라고 하면 이곳을 말하지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10월 중순부터 5월 초순에 걸쳐 강설과 결빙이 계속됩니다.

    간도는 원래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이 지방으로 뻗어나면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발해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이후 고려부터 조선에 걸쳐 여진족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간도는 여러 지류의 연안을 중심으로 한 분지와 구릉으로서, 산지가 발달해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해 각종 자원도 풍부한 지방이었지만 여진족이 농경보다 유목과 수렵에 종사하였기 때문에개척되지 못하였고,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개척을 했습니다.

    철종 말에서 고종 초부터 간도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넘어갔으며, 1910년을 전후해 일제 침략의 손길에서 벗어나고자 또는 항일 운동의 새로운 기지를 구해 간도로 이주하는 사람이 대폭 늘어났습니다.

    이 당시 간도로 이주한 우리 나라 사람은 2만 5,193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간도 지역으로의 이주와 항일 투쟁도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만주국이 수립되자 중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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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1.08

    1914년 프랑스 파리의 <소시에떼 데미시용 에트랑제트>가 발행한 "까똘리시즘 앙꼬레"에 게재하였던 바티칸 교황청이 한국에 있어서의 교구의 관할 영역을 표시한 지도에 간도와 연해주까지 표시하고 있다.


    또한 국경을 표시한 백두상 정계비의 내용중 토문강(土門江)-도문강(圖們江)-두만강(豆滿江)은 같은 발음임을 예시하며 동일한 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은 토문강은 중국의 여러 지도에도 송화강의 상류로 표시되어 있는 점을 증거로 제시하며 두만강과는 엄연히 다른 별개의 강이라고 맞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국 전요지(全遼志)에는 토문강의 이름을 토문하(土門河)로 적고 있으며 송화강의 원류라고 밝혀 놓았고, 정약용의 조선강역지(朝鮮疆域誌)에도 토문강은 송화강의 상류로 표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규장각(奎章閣)에서 찾아낸 백두산 정계비도(定界碑圖)에도 토문강원이 송화강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백두산 정계비는 일제가 철거함으로서 흔적조차 찾을수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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