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민간인을 포함한 조선 측 사망자는 180,000여 명에서 1백만명으로 추정, 또 경작지 중 66%가 파괴되었습니다.
문화재 손실도 막심해 경복궁을 위시한 건축물과 서적, 미술품 등이 소실되었는데 역대실록 등 귀중한 사서를 보관했던 사고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 경복궁이 파괴되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에도 한동안 월산대군이 개인 저택으로 사용하던 집을 궁궐로 대용했습니다.
이 외에 민가 많은 수, 포도청, 서원 등이 파괴되어 한국전쟁과 비견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는 한편 병제 개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해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얻어 절강무예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고 훈련도감을 설치, 삼수병을 두어 무예를 조련시켰습니다.
무기로서 원래 무기린 궁시창검, 총통, 완구, 화전 외에 비격진천회와 화차가 발명, 조총과 더불어 불랑기를 이용했습니다.
또 백성의 사상 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애국심과 자아반성 등 여러 방면에서 개선과 명을 향한 사대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 높아졌고 전란 중 명군이 관우를 숭배하는 사상을 전래하며 민간신앙이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