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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하늘소177
힘찬하늘소17723.07.28

조선 세조때 남이라는 인물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조선 초기 세조때 등용되었던 남이라는 인물은 최연소 병조판서였지만 끝이 좋지 않았던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또한 남이섬의 이름이 이분의 이름을 따왔다는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남이라는 인물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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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은 의령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인 남재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남빈, 어머니는 남양 홍씨입니다.

    아버지인 남빈은 조선의 제 3대 왕인 태종의 딸 정선공주가 의산군 남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조선의 제 7대 왕인 세조에게 남이는 고종사촌의 아들인 셈입니다.

    남이는 13세 되던 해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고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권람의 딸과 결혼해 남구을금이라는 딸을 낳았으나 일찍 사별, 고성 이씨와 다시 혼인했으나 고부 간에 갈등이 심해 1468년 왕에게 아내와의 이혼을 허락받았습니다.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는 남이와 구성군 이준 등 젊은 종친들을 중용해 원로대신들을 견제하려 했고 남이는 세조가 1460년 무인들을 등용하기 위해 실시한 경진무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1466년 실시된 발영시에도 급제했습니다.

    1467년 김용달과 함께 포천, 영평 일대 도적떼의 토벌을 지휘, 그해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이준이 도총사가 되어 이끈 토벌군에 군관으로 참여, 진북장군 강순의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북청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그 일로 행 부호군이 되었으며 당상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후 행 호군이 되어 종성에 주둔하며 온성, 경원, 경흥 등의 고을을 다스렸으며 군공을 인정받아 적개공신 1등으로 포상되었습니다.

    1467년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고 이어 명의 요동군이 남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건주여진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해오자 강순, 어유소와 함께 윤필상이 이끄는 북벌군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그해 음력 12월 27세의 나이로 공조판서가 되었고 왕궁의 호위를 담당하는 겸사복장의 지위를 겸했습니다.

    1468년 음력 5월 서현정에서 열린 연회에서 술에 취해 세조에게 이준만을 편애한다고 실언해 의금부의 감옥에 갇혔다가 다음날 풀려났으며 겸사복장의 지위에서 파직되었습니다.

    그해 7월 세조가 이준을 20대의 나이에 영의정으로 임명하면서 남이도 공조판서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의 지위를 겸하게 되었으며 8월 병조판서로 삼았지만 한계희 등 대신들의 반대로 9월 병조판서의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겸사복장이 되었으며 조부와 마찬가지로 의산군으로 봉해졌습니다.

    그러나 1468년 10월 병조참지 유자광의 고변으로 역모의 혐의를 받고, 그해 음력 10월 27일 강순, 변영수, 변자의 , 문효량 등과 함께 저자에서 거열형으로 처형, 그의 어머니도 다음날 거열형으로 처형되었으며 딸은 한명회의 노비가 되었으나 이듬해 외조부인 권람의 공이 참작되어 사면되었습니다.

    남이는 1818년 음력 3월 10일 우의정 남공철의 청에 따라 강순과 함께 사면되어 관작이 복구되었고 1910년 충무의 시호가 추증,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남이의 묘소로 전해지는 남이장군 묘가 있고,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의 남이섬에도 그의 가묘와 추모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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