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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윽한그늘나비286
그윽한그늘나비28623.02.03

약산 김원봉은 좌익과 우익 어느쪽 진영의 사람이었나요?

정화암의 증언에 따르면 김원봉은 민족주의의 근성을 버리지 못한 민족주의자라고 했는데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며 김원봉과 절친한 관계였던 최창익역시 그를 사회주의자로 보지 않았는데 왜 역사가들을 그를 좌익사회주의자로만 기록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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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약산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시절 좌익 계열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의 대표격인 인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https://m.jsd.or.kr/?c=culture/culture1/992&uid=2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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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목상으로는 중도파를 아우른다 하였으나 실상은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이자, 진보적 민족주의 단체인 인민공화당의 위원장이었던 김원봉은 미군정 하에서 더이상의 활동이 어려워졌다. 김원봉과 함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공동의장이었던 박헌영, 백남운, 허헌은 1947년 말에 모두 월북했다. 하지만 김원봉은 남한에 더 머물렀다.


    당시 극심한 좌우 대립으로 혼란하던 서울에서 사회주의 핵심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던 김원봉은 다른 거물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공공연한 협박에 백색테러 위협을 받기도 했다. 남한에서 점차 공개적인 활동이 어려워지자 김원봉은 중국에서 그랬던처럼 거처를 수시로 옮기고 잠행을 했다. 강준만에 의하면 한곳에 2시간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고 한다.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김원봉과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한국 내 좌익 세력의 최대 거물이었던 김원봉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민전이 와해되면서 김원봉의 권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김원봉은 사마로(司馬路)[39]에게 월북 이전에 보낸 편지에서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쪽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고 쓰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자 월북을 결심한다.


    북조선민전은 1948년 3월 25일에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서한을 김원봉 을 포함한 김구, 김규식, 홍명희, 백남운, 박헌영, 허헌, 김창준 등에게 발송 하였다. 남조선민전 등에서도 남북협상 실현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김원봉도 조선인민공화당을 대표하여 남북협상 회의에 참가하겠다고 연락원 을 통해 답신을 보냈다. 남조선민전 발표에 따르면 조선인민공화당은 김원봉 외 7명이 1948년 4월 9일에 새로운 정치무대 평양으로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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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약산 김원봉은 보편적 사회주의 이념을 자신의 실천적 삶의 모습에 투영시킨 사회주의 혁명가였습니다. 체게바라가 순수하고 철저한 공산주의 혁명가라면, 약산은 그냥 보편적인 사회주의자로 공산주의자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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