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기원과 세계 및 한국 최초 영화가 궁금합니다.
하나의 영화가 인류에 전달하는 메시지는 엄청 큽니다. 그리고 벌여 들이는 경제적 효과도 상당하고요. 영화 산업은 인류 문화가 집약되어 있고요. 영화의 기원과 세계 및 한국 최초 영화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화는 개화기 시절 서구문물이 쏟아저 들어오는 가운데 한국에도 들어왔다. 최초로 상영한 시기는 1903년 이전으로 보고 있으며 당시에는 움직이는 사진이란 뜻의 활동사진으로 불렸다.
역사상 최초의 한국 영화는 1919년작 《의리적 구토[2]》인데, 다만 이 작품은 100% 영화가 아니라 연극 중간에 영화를 상영하는 방식의 일명 연쇄극이었다. 이후 1923년에 조선총독부의 저축 장려 캠페인으로서 제작된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가 나왔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필름은 다름아닌 러시아에서 발견되어 한국에 전해진 흑백 무성영화 <근로의 끝에는 가난이 없다>로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영화는〈농중조〉(1926)의 감독이자 나운규의 《아리랑》(1926)에서 주인공 영진의 아버지 역으로 출연한 이규설이 감독과 같이 카메오로 나와 그의 존재를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제작이나 촬영은 일본인이 맡았고 월하의 맹서처럼 계몽영화이지만, 감독과 각본, 배우들은 조선인들이 맡은 완벽판으로 필름이 남은 가장 오래된 한국영화이다. 2019년 러시아 고스필모폰드에서 찾은 이 영화는 일제 당국의 교육계몽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조선인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들이 출연해 만들어졌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덕분에 유튜브에도 공개되어 100년이 넘는 한국영화로 가장 오래된 영화로 흔히 볼 수 있게 된 작품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한국 영화의 시금석이라 평가되는 것은 그 유명한 춘사 나운규의 1926년작 《아리랑》이다. 그 전까지도 3편의 영화 참여 경험이 있던 나운규는 불과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흥행, 완성도, 주제 의식,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3]까지 두루 갖추어 어디에 자랑해도 손색이 없는 이 걸작을 발표함으로써 '한국 영화의 아버지'라 불리기 손색이 없는 위업을 수립했다. 더 놀라운 것은 주인공을 포함해 감독, 각본까지 1인 3역을 도맡았다는 점이다!
나운규는 아리랑으로 한국 영화에 처음으로 묵직한 족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1927년에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해 그가 사망하는 1937년까지도 쉬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하여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1926년작 《풍운아》, 1928년작 《사랑을 찾아서》, 1929년작 《벙어리 삼룡》 등이 대표적이다. 1930년대에는 흥행 참패에 따른 슬럼프로 방황하기도 했고 때로 일본의 영화사에 몸을 담았다가 지탄받기도 했지만 끝까지 영화에 대한 열의를 잃지는 않았다. 그리고 만년인 1937년에는 《오몽녀》라는 걸작을 만들었으나 불과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리랑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이 소실되어 나운규나 당시 영화는 별로 남아있는 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랑 기념우표가 발행될 당시 우표에 수록된 장면이 아리랑 1편이 맞냐며 진위를 놓고 뜨거운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4]
나운규가 10여 년에 걸쳐 불꽃같은 족적을 남기고 간 사이 한국 영화계는 한바탕 큰 혁신을 이룬다. 변사가 대사를 읊던 시절을 떠나, 비록 후시녹음이긴 하나 배우가 직접 대사를 내뱉는 발성영화의 시대를 맞은 것이다. 1935년작 《춘향전》이 최초의 발성 영화로 평가된다. 하지만 변사라는 직업이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그들은 한국전쟁 이후까지도 존재했고, 심지어 아직도 직접 변사를 경험했던 인간문화재급의 인물이 생존해 있다. 변사는 무성영화 시절 영화의 재미와 감칠맛을 더해준 스타였으며 지금의 인기 성우나 개그맨 이상으로 좋은 대우를 받았고 극장마다 서로 모셔가려 안달이었을 정도였다.
그 밖에도 《상록수》로 유명한 작가이자 영화 관계자인 심훈도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으나, 지금까지 필름이나 자료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광복 이전 한국 영화 필름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필름 상태가 열악한 경우가 많은 반면에 필름 상태가 매우 좋은 당시 몇몇 영화들은 공교롭게도 일본에서 보관하고 있던 친일 홍보 영화다. 아직도 유튜브에는 《반도의 봄》이나 《집 없는 천사》 같은 영화들이 약간 남아있다. 그 밖에도 1993년 해외에서 필름이 발견된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가 있는데 이게 그 시절 영화에서 가장 오래된 한국 영화(친일 영화 제외)로 기록되기도 했었다.
그 뒤로 한국영상자료원이 작정하고 이 시대의 영화 필름을 찾아나선 결과 해외에서 한국 영화 필름들이 차례로 발굴되면서 이 기록이 차례로 깨졌다. 2005년 중국에서 양주남 감독의 발성영화 《미몽》(1936)이 발견되면서 가장 오래된 한국 영화로 기록되었으나, 2년 후인 2007년 서울의 단성사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안종화(1902~1966) 감독의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1934)가 발견되면서 타이틀을 갈아치웠다.
이들 영화가 발견된 것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청춘의 십자로》는 2007년 구 단성사 건물이 철거되면서 창고를 비웠는데, 여기에 오래된 질산염 필름 9롤이 발견되었다. 이 중 8롤이 《청춘의 십자로》였다. 불행히도 이 중 1롤의 필름 보존상태가 너무 나빠서 백화현상이 생기며 바스라졌기 때문에 완전복원은 불가능했고, 나머지 7롤만 복원에 성공했다. 총 73분 정도의 분량이 복원되었는데 이 정도면 꽤 좋은 복원을 이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무성영화 필름이라 관심도 뜨거웠다. 영상자료원은 복원 뒤 2008년에 변사의 해설과 함께 상영하기도 했고, 여러 차례 추가 재상영을 했다.
현존하는 2번째로 오래된 한국영화이자 가장 오래된 발성영화인 《미몽》도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 2005년 중국에서 발견했을 때 필름 분량이 49분 정도만 남아 있고, 상태도 매우 나빠서 앞뒤 연결이 다소 안 되는 것이 흠이다. 이 작품도 전주국제영화제를 비롯한 곳에서 상영된 바 있다.
1934년 이전의 영화는 아직 발견된 바가 없다. 영화 《아리랑》 필름이 남아있네 뭐네 논란이 있었으며, 어느 일본인이 이 영화 필름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통에 더 논란이 거세진 적이 있으나 거짓임이 드러나기도 했다.출처: 나무위키 한국 영화/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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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초의 한국 영화는 1919년작 《의리적 구토》인데, 다만 이 작품은 100% 영화가 아니라 연극 중간에 영화를 상영하는 방식의 일명 연쇄극이었다.
-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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