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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풍습이 고구려로 계승되었나요?

부여의 풍습이었던 우제점복, 1책 12법, 형사취수제 3가지 풍습 모두 전부 다 고구려에 계승되었나요? 아니면 일부만 계승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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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의 문화와 풍습


    종교 생활

    고구려 사람들에게 종교는 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들은 조상에게 제사를 자주 올렸으며, 때로는 신으로 섬기기도 했다. 특히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과 그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은 각각 고등신과 부여신으로 받들어져 매년 열리는 동맹 축제에서 섬김을 받았다. 고구려 사람들은 추모왕을 천신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천신은 고구려인이 모신 최고의 신이다. 그의 후손이 고구려를 세운 만큼 고구려는 남다른 신성한 나라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고구려인에게는 자부심이었다. 따라서 그 자부심과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동맹 축제에서 추모왕이 신의 자손으로 이 땅에 태어났음을 확인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도 저승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에 거대한 무덤들이 만여 개 이상 몰려 있었던 것은 이러한 믿음 때문이다. 고구려인들은 용, 학, 기린 등을 타고 다니며 오래도록 살아가는 신선의 삶을 최고의 이상적인 삶으로 여겼다. 또 천신과 조상신 이외에도 해의 신, 달의 신과 농사의 신, 불의 신 같이 기능을 가진 신들을 비롯해서 다양한 신들을 섬겼다. 종교적 의례를 담당하는 무당이나, 제사장, 그리고 신전이 있었으며, 수시로 신들을 받드는 의식이 치러졌다. 왕들도 천신과 조상신께 바치는 제사와 동맹축제에는 결코 빠지지 않았다.

    고구려 종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온 것은 AD372년에 국가에서 종교로 인정받은 불교였다. 불교는 구체적 신상(神像)을 가진 부처님과 전문 신앙인의 조직체인 교단을 제대로 갖춘 종교였다. 고구려 불교는 왕과 그 가족의 적극적 지원을 받으면서 여러 곳에 사찰을 세었고, 거대한 탑과 금으로 만든 불상 등을 만들었다. 고구려의 스님들은 신라에 불교를 전해주고, 왜를 비롯한 주변 나라에 불교 문화를 전해주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축제와 놀이, 생활풍습

    고구려 사람은 춤과 노래를 매우 즐겨하는 사람들이었다. 매우 엄한 법질서를 갖고 있고 수시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긴장된 사회에 사는 고구려인들에게는 밤늦도록 마을 사람들과 모여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이 삶의 피로와 긴장을 풀어주는 가장 좋은 오락이 될 수 있었다. 매년 10월 하늘과 조상신에게 제사지내는 동맹(東盟)은 물론, 크고 작은 축제가 열려 신분의 높고 낮음, 부유한 정도의 차이를 떠나 서로 어울려 축제를 즐겼다. 고구려의 동맹 행사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엄격하게 예(禮)를 따지며 장중한 분위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해주는 중국의 제사풍습과는 크게 달랐다. 신이 강림할 때에 함께 어울려서 신을 맞이하고 서로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함께 신의 기운을 받아 함께 즐기는 축제의 장이 동맹이었다.

    매년 초에는 강가에 사람들이 나와 노는데, 왕도 여기에 참관하여 구경을 했다. 사람들은 서로 돌을 던지며 싸우는 돌싸움을 하기도 했는데, 이 풍습은 20세기 중반까지도 한국에 계승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바둑, 장기, 축구와 유사한 축국이라 불리는 공차기 놀이, 주사위 놀이, 윷놀이와 투호 같은 놀이도 즐겼다. 또 씨름과 수박도 있다. 수박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대표적 무예인 태권도 등으로 발전하는 겨루기 놀이였다. 씨름은 현재까지 전해오는 놀이로서 두 사람이 각자 허리에 샅바를 맨 후, 상대편 샅바를 잡고서 손과 발을 이용해 서로를 먼저 땅에 닿게 하는 경기다. 고구려 사람들은 서역에서 전해온 서커스를 관람하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듣거나, 자신이 직접 거문고, 완함, 피리를 비롯한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

    사냥 역시 고구려인에게는 중요한 오락이었는데, 산과 들에 나가 대규모로 사냥을 하기도 했지만, 표적을 설정해놓고 서로의 활쏘기 솜씨를 겨루는 것도 중요한 놀이였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은 ‘주몽’이라 부르며 존중해주었는데,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의 별명이 곧 주몽이었다. 고구려 청소년들은 교육기관인 경당에 가서 글공부와 함께 활쏘기 등을 배웠는데, 이런 평소 훈련 탓에 고구려의 강한 군대가 만들어 질 수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결혼을 할 때면 먼저 신부의 집에서 사위가 머물 수 있는 작은 집인 서옥을 짓고, 이곳에서 부부가 아이를 낳아 성장할 때까지 살게 하는 서옥제라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이 풍습은 점차 고구려 후기로 갈수록 사라지게 되며, 남녀가 모두 서로 사랑하면 바로 결혼할 만큼 자유로운 결혼 풍습이 생겼다.

    장례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었는데, 장례는 많은 비용을 치르고 크게 행사를 했다. 특히 죽은 자가 살았을 때 쓰던 물건을 무덤에 많이 넣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후기에는 죽은 자의 유품을 무덤 옆에 놓아두어서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가져가게 하는 풍습으로 변하기도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는 눈물을 흘리며 몹시 슬퍼하지만, 장례를 지낼 때에는 오히려 풍악을 울리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죽은 사람을 떠나보냈다.


    세계문화유산 - 산성과 릉비, 고분벽화

    고구려에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화려한 색감과 다양한 소재를 자랑하는 고분벽화, 1,500년이 흘러도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높은 성벽(城壁), 그리고 거대한 비석을 들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산지에 풍부한 돌을 채취하여 교통과 방어의 요지에 어김없이 튼튼한 성벽을 만들었다. 성은 고구려 건축 기술의 종합체였다. 특히 치(雉)는 성벽에서 돌출하여 나온 시설물로 공격해오는 적을 삼면에서 반격할 수 있어 성의 방어력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성벽의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성벽 하단은 튼튼한 큰 돌로 쌓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쌓았으며, 성벽의 각도를 조정하여 안정감을 갖게 했다. 또 자연의 절벽이나, 바위 등을 그대로 깎아내기보다는 이를 그대로 활용했으며, 돌과 돌이 서로 맞물리게 쌓아 가장 견고한 방어벽을 만들었다. 고구려의 성벽 축조 기술의 우수성은 주변국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여러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여러 강대국들이 고구려와 전쟁을 기피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고구려의 성벽이 워낙 견고하여 섣불리 공격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고구려 옛 터 곳곳에서는 1,500년 전의 고구려 성벽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돌을 잘 다룬 고구려인들은 거대한 돌무덤을 만들기도 했다.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흔히 불려지는 장수왕릉은 높이 13미터, 폭 31미터의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다. 고구려에는 이와 같은 돌로 만든 무덤들과 내부에 돌로 방을 만들고 외부는 흙으로 덮은 무덤들이 1만기 이상 남아있다. 그 가운데는 한 변의 길이가 71m나 되는 거대한 무덤도 있다. 왕과 귀족의 거대한 무덤들은 수묘인(守墓人)에 의해 관리되고, 정기적인 제사가 이루어졌다.

    광개토태왕의 무덤 앞에는 거대한 돌로 된 광개토태왕릉비가 있다. 414년 장수왕이 부친의 무덤 앞에 세운 높이 6.39m, 무게 37t에 이르는 거대한 돌의 4면에는 1775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으며, 세계적인 대형 석비로 그 비문의 가치는 대단히 높다. 이 비에는 수묘인에 대한 관리 규정을 비롯해서, 고구려의 간략한 역사와 왕의 계보, 그리고 광개토태왕의 업적이 적혀져 있다. 한편 1979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었는데 2000자에 가까운 비분 가운데 200자 남짓한 글자만 판독했지만 고구려의 남방 경영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고구려의 예술을 대표하는 작품은 약 100기의 옛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들이다. 무덤에 묻힌 자의 편안한 안식을 위해 그려진 고분벽화는 다양한 내용이 담긴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무덤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하거나 특정한 의미를 나타내는 장식무늬, 무덤 주인의 생전에 기억할 만한 모습과 생활상, 편안한 영혼세계로 가기 위해 악령들을 물리치는 수호신인 사신(四神)과 용맹한 수문장, 도깨비, 천상계의 신들의 모습, 별자리 등이 그것이다.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는 고구려 사람들의 당시 생활상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생생히 보여준다는 점과 뛰어난 그림 솜씨 때문에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뛰어난 색감과 생동감 넘치는 필치가 돋보이는 고분벽화 가운데, 250명이 야외 행차하는 모습이 그려진 안악3호분의 대행열도, 무용총 벽화의 수렵도, 강서대묘의 현무도, 강서중묘의 주작도 등은 같은 시대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또 사신도와 신선도가 많이 그려진 5회분 4호묘 벽화는 당시의 화려한 채색이 지금까지도 거의 손상되지 않고 아름다운 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보는 이를 감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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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의 문화

    부여에서는 “은정월(殷正月)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국중대회는 연일 계속되며, 음식을 먹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이를 영고(迎鼓)라고 했다. 군대를 동원할 일이 있으면 또한 하늘에 제사했다.”고 전해진다. 즉, 일년에 한 번씩 12월에 영고라는 국중대회를 열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마한의 10월제와 같은 성격의 제례로 씨족 사회의 관습에서 이어져 온 수확감사제였다.
    그런데, 부여의 영고가 본격적인 사냥철이 시작되는 시기인 은정월(12월)에 치뤄진 것은 공동수렵을 하던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축제 때에는 노예외 외래민을 제외한 전 부여의 읍락민이 참여해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추며 보냈다. 또한 노인과 어린아이 모두 종일토록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부여인들이 가무와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국중 대회 때에는 죄수를 판결하고 석방하기도 하였고, 한 해 농사의 풍흉이 결정되는 이 때에 왕을 교체하거나 살해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도 이 때에 이뤄진 회의에서 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밖에도 부여에서는 생활용기를 만드는 공예가 발달하였으며 기와와 벽돌을 이용하여 지은 궁성도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들은 백색을 숭상하여 흰 옷을 즐겨 입었으며, 가죽신을 신었고, 상의와 겉옷(두루마기), 바지를 입었다. 국외로 나갈 때에는 수를 놓은 찬란한 비단옷을 입었다고 한다.

    부여의 문화유적지...

    [부여의 유물]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 - 국보 9호

    부여능산리출토백제금동대향로 - 국보 287호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 국보 288호

    당유인원기공비 - 보물 21호

    보광사대보광선사비 - 보물 107호

    부여정림사지석불좌상 - 보물 108호

    부여장하리삼층석탑 - 보물 184호

    무량사오층석탑 - 보물 185호

    부여석조 - 보물 194호

    금동석가여래입상 - 보물 196호

    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 - 보물 217호

    무량사석등 - 보물 233호

    군수리석조여래좌상 - 보물 329호

    군수리금동미륵보살입상 - 보물 330호

    무량사극락전 - 보물 356호

    무량사미륵불괘불탱 - 보물 1265호

    오덕사괘불탱 - 보물 1339호

    부여세탑리오층석탑 - 시도유형문화재 21호

    현내리부도 - 시도유형문화재 22호

    금성산석불좌상 - 시도유형문화재 23호

    부여석목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 - 시도유형문화재 24호

    무량사김시습부도 - 시도유형문화재 25호

    부여홍량리오층석탑 - 시도유형문화재 29호

    의열사비 - 시도유형문화재 46호

    부산각서석 - 시도유형문화재 47호

    무량사당간지주 - 시도유형문화재 57호

    김시습영정 - 시도유형문화재 64호

    부여동헌 - 시도유형문화재 96호

    홍산객사 - 시도유형문화재 97호

    무량사오층석탑출토유물 - 시도유형문화재 100호

    [부여의 유적지]

    부여성흥산성 - 사적 4호

    부여부소산성 - 사적 5호

    부여능산리고분군 - 사적 14호

    부여청마산성 - 사적 34호

    부여군수리사지 - 사적 44호

    부여나성 - 사적 58호

    부여청산성 - 사적 59호

    부여석성산성 - 사적 89호

    부여쌍북리요지 - 사적 99호

    궁남지 - 사적 135호

    증산성 - 사적 156호

    부여송국리선사취락지 - 사적 249호

    부여정림사지 - 사적 301호

    부여정암리와요지 - 사적 373호

    부여능안골고분군 - 사적 420호

    부여화지산일원유적 - 사적 425호

    왕흥사지 - 사적 427호

    부여관북리백제유적 - 사적 428호

    부여능산리사지 - 사적 434호

    부여금강사지 - 사적 435호

    ※ 출처

    http://kdaq.empas.com/knowhow/view.html?num=63864&d=0&l=&ps=kl&pq=cn%2525253D754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6&dir_id=612&eid=znUKsIwjnno7lNT5JutsKOvxWOsfXNql&qb=us6/qcDHILmuyK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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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부여의 풍습은 신라 백제 고구려에 큰 영향을 미쳤고 다 조금씩 계승 물려 오게 ㅁㄷ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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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는 건국신화 자체가 부여의 것과 완벽히 일치할 정도로 자신들의 정체성이 부여출신임을 숨기지 않았음.

    (그러나 이와 별개로 부여-고구려는 서로 앙숙관계였음.)


    백제는 국성부터가 "부여"이며,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기 전까지도 꾸준히 자신들이 부여의 후손임을 대외적으로 표방했음.


    발해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구려만 계승한 것은 아님.

    실제로 발해 무왕은 자신들이 발해의 풍습을 계승했음 또한 대외적으로 주장했음.


    고려는 아예 부여를 봉국으로 삼아버렸음.

    왕자에게 "부여공"이라는 제후 작위와 국명을 봉한 것.

    즉, 아예 부여가 자기 역사의 일부임을 표방하여 계승의 정통성을 다졌다는 거임.


    비록 조선이 건국되고, 고조선의 후예를 자처함으로서 부여가 주는 정통성과 상징성이 단절되었지만, 한국사 전반에 엄청난 상징성을 줬던 대단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음.


    여담으로 부여는 고조선과 동시대에 존재했으며, 고구려에 흡수되기 이전까지 동북아 패권국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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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는 부여의 왕위를 계승한 나라로서 부여의 그 세가지 풍습을 비롯해 많은 부분을 계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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