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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때까치29
굳센때까치2923.08.24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왜 강화도로 못가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건가요?

병자호란 당시에 인조는 왜 강화도로 못가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건가요? 그리고 통치자가 사실상 수도를 버리고 떠났다면 이미 나라가 적국에 넘어간 것으로 볼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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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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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2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처음에는 강화도로 피신하려고 했지만 강화도로 가는 길목이 막혀서 남한산성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너무 재빠르게 남하해서 인조가 남쪽으로 피난갈 틈도 없이 포위되었고 결국 도성 근처의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된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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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시대 인조는 강화도로 가고 싶었어도 이미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를 점령 해 버리는 바람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한 산성으로 피신을 한것인데 인조가 경북궁을 버리고 남한 산성으로 간 것이 도성을 버린 것이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남한 산성은 서울에서 약 30키로 정도 밖에 떨어진 곳이기에 몽진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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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봉화를 막고 1차 선봉대를 그냥 보낸 탓에 인조가 크게 당황하여 강화도 대신 남한산성으로 거처를 옮기는 한가지 원인이 됩니다.

    인조가 한양 남대문을 나선 시각에 청나라군이 서대문 근처 홍제원까지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지만 정세가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자 세자만 보내고 남한산성으로 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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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 입니다.

    ✅️ 그 이유는 이미 청나라가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며, 사실상 인조가 한양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것 자체가 청나라에게 절반 정도는 항복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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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병자호란 당시에 인조가 강화도로 못가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강화도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서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청군이 한양을 점령하더라도 쉽게 공격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습니다.

    • 그러나 강화도는 한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청군이 강화도를 공격하기로 결심한다면 쉽게 함락될 수 있는 위험도 있었습니다.

    • 남한산성은 한양에서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청군이 한양을 점령하더라도 쉽게 공격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 또한, 남한산성은 한양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청군이 남한산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통치자가 사실상 수도를 버리고 떠났다면 이미 나라가 적국에 넘어간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이것은 통치자의 권력과 위신, 그리고 나라의 운명에 대한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입니다.

      통치자의 권력과 위신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통치자가 수도를 버리고 떠났다면 이미 나라의 운명이 결정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통치자가 수도를 버리고 떠났다는 것은 통치자의 권위가 무너졌으며, 나라의 군사력과 민심도 흔들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운명에 대한 관점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통치자가 수도를 버리고 떠났다고 하더라도 나라가 아직 완전히 적국에 넘어간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통치자가 수도를 버리고 떠났더라도, 여전히 나라에는 군사와 민중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병자호란 당시의 인조의 경우, 청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인해 한양을 점령당하고 말았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청군에 맞섰지만, 결국 청군의 요구에 따라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인조의 수도 버림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 하셔서 도움되셨다면 추천 좋아요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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