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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태양새285
탁월한태양새28523.05.17

트라팔가르 해전의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트라팔가르 해전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나요?

그리고 트라팔가르 해전이 일어나기까지의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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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폴레옹 전쟁 중이던 1805년 10월 21일 스페인 남서쪽의 트라팔가르 곶(El cabo de Trafalgar)에서 벌어진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스페인 해군 연합함대의 결전을 말합니다.

    이미 유럽 대륙을 거의 제패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마지막 장애물 영국을 박살내고자 했다. 1803년 영국은 바로 전 해 체결된 아미앵 화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했고 우월한 해군력을 활용해 프랑스의 해안을 봉쇄하였다. 또한 영국은 지상군 전력으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스웨덴,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을 끌어들였다. 일명 오스트리아 전쟁,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시작이었다.

    선전포고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자신의 패권을 가로막는 마지막 방해물인 영국을 박살내기 위해 18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새로 편성하여 영불 해협과 접한 불로뉴 해안에 집결시켰다. 하지만 이들을 해협 건너편인 영국에 상륙시키는 것은 프랑스의 해안을 봉쇄하고 있는 영국 해군을 와해시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봉쇄를 뚫고 영국 해군을 와해시킨다는 것은 프랑스의 해군력으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는 결론은 천재적 전략가인 나폴레옹 본인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집트 원정 당시 아부키르 만 해전의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을 전부 섬멸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군대를 상륙시키는 데 필요한 6시간을 포함해서 딱 24시간 동안의 영불 해협의 제해권이었다. 나폴레옹은 영불 해협을 방어하는 영국 해군을 섬멸하고 24시간 동안만 영불 해협의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으면 6시간 안에 18만 명의 지상군을 영국에 상륙시킬 수 있다고 계산했다. 상륙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지상전에서 그때까지 불패를 자랑하던 천재적인 전략가이자 전술가인 나폴레옹 본인의 몫이었으므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때는 이른바 나폴레옹의 전성기 시절이어서 후반기 보여주는 판단착오나 실수는 거의 없었다. 반면, 대불동맹군은 아직 나폴레옹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신나게 털리기만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24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프랑스 해군의 임무였다. 나폴레옹은 해군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려고 동맹국이 된 스페인 함대까지 끌어들인 후에 연합 해군으로 하여금 영불해협 근처의 영국 주력함대를 유인하여 영국 해군의 전력을 분산시킨 후, 영국 해군 함대가 분산된 이후에 프랑스 해군함대를 집결하여 영국 해협함대를 상대하며 영불해협에서 수송함대가 무사히 해협을 횡단할 시간을 벌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해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해군에 정확한 시간에 육군식으로 맞추는 요구를 했는데, 범선 시대에 해군이 그런 정확한 타임테이블을 맞출 수는 없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가장 경험많고 능력이 뛰어난 영국 해군에게도 절대 불가능에 가까운 무리한 요구였다. 물론 수적으로 우세한 영국 함대를 분산시킨 후 각개 격파후에 시간을 끈다는 자체는 좋았지만 전열함이라는 전함들의 특성과 바다 기후의 특성을 간과한 것은 나폴레옹의 착각이었다.

    게다가 이 작전은 시작하기도 전에 삐걱이기 시작했는데, 그나마 해전 경험이 많고 능력이 있었던 제독인 트레빌이 갑자기 사망한 것. 트레빌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해 영국 해군을 격파한 적도 있고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아이티 쪽에 프랑스군을 보내는 임무에서도 중추를 맡아 잘 수행하기도 하는 등 경험있던 제독이다. 무엇보다 항구에서 방어한 것이기는 해도 넬슨을 막아낸 적도 있었는데 1804년에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8] 이 공백을 채워야 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 나폴레옹도 한참 고민했으며, 급기야 나폴레옹은 후보 3명을 비서에게 언급하며 누가 제일 나은지 묻는다. 비서는 패전이긴 해도 해전 경험이 있기는 했던 빌뇌브를 선택했으며 결국 빌뇌브가 툴롱 함대 및 연합함대의 사령관을 맡아 넬슨의 느슨한 포위망을 뚫고 출발하게 된다.

    그래도 빌뇌브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무사히 카디스 항에 도착하여 그라비나 제독의 스페인 함대와 합류하였고, 1805년 4월에 서인도 제도를 습격하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 지중해에 있던 호레이쇼 넬슨은 황급히 서인도 제도로 달려갔다. 그러나 빌뇌브 함대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귀환하던 중 칼더 제독의 영국군 함대와 만나 교착에 빠졌다(피니스테리 곶 해전. 1805. 7. 22). 그리고 자신의 연합함대의 부족한 실력을 현실적으로 잘 알고 있어서 처음부터 자신없던 빌뇌브는 영불해협으로 항진하지 않고 카디스로 대피했다. 이 순간에 이미 나폴레옹의 영국 본토 진공계획은 무산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트라팔가르 해전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05년 유럽 대륙은 나폴레옹 1세가 이끄는 프랑스 제1제국의 지배 하에 놓였지만 해상은 여전히 영국이 장악했고 영국은 해상 봉쇄를 통해 프랑스의 해군력을 억제하고 영국 본토 침공을 막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엄호하고자 이 해상 봉쇄를 돌파하라 명했고 프랑스와 스체인은 연합 함대를 편성, 해상 봉쇄를 돌파하고 불로뉴 항에 집결된 35만 원정군으로 영국 본토 상륙을 엄호하라는 임무를 받았고 영국은 이를 허레이쇼 넬슨의 함대를 보내 맞섰습니다.